제주에서 살아가는 16명의 에세이 ‘나는 여기 잘 도착했다’

한형진 기자 2025. 6. 1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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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32, 100일간 진행한 출간 프로젝트 결과물 발간
사진=함덕32

출판사로서 영역을 확장한 제주 문화예술연구소 함덕32가 처음으로 책을 펴냈다. 16명과 함께 100일 진행한 출간 프로젝트의 결과물 '나는 여기 잘 도착했다'이다.

'나는 여기 잘 도착했다'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함덕32에 모여 100일간 집중적으로 글을 쓴 출간 프로젝트의 결과다. 지도는 지난해 문학상주작가로 활동한 20년 차 베테랑 편집자이자 작가 강건모가 맡았다. 

책 소개에 따르면, 프로젝트 참가자 16명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부터 삶의 새로운 국면에서 이 섬에 깃든 이들까지, 다채로운 삶의 이력을 가졌다. 고창화, 기낭, 김싱숭, 김윤옥, 말로장생, 민은지, 박민진, 배윤정, 손정은, 오순주, 양민희, 이랑, 전근아, 조미연, 청정, 홍진영 등이다.

책은 하루의 시간을 따라 총 4부로 구성됐다. '어둠에서 빛으로(00시~06시)'는 불면과 고요 속에서 피어오르는 유년의 기억, 글쓰기의 습관, 삶을 향한 근원적 질문들을 마주한다. 

'햇살의 울림(07시~12시)'은 아침 햇살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제주의 생생한 일상을 담는다. 이주민의 시선으로 본 섬 생활의 현실, 지역성과 생계의 문제, 아이와 함께하는 육아의 고투 등 현실감각이 돋보이는 풍경이다.

'한낮의 사색(13시~16시)'은 태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시간이지만, 역설적으로 내면의 그림자가 가장 짙어지는 때임을 보여준다. 과거의 상처, 이별의 아픔, 삶의 중대한 전환점에서 겪었던 뜨거운 감정들이 응축됐다.

'다시, 문턱에서'(17시~24시)는 하루가 저물고 새로운 날로 향하는 문턱에서 마주하는 상념들을 그러모은다. 가족의 부재, 죽음과 상실, 그리고 그 이후의 회복과 용서의 이야기가 가장 밀도 높은 감정으로 펼쳐진다. 

새벽 2시는 하루의 가장 끝자락에 꽂을 수 있는 압정 같은 시간이다. 어제를 끌고 와 오늘이라 부를 수 있는 경계선 같은 순간이다. 대부분의 밥집은 밤 10시쯤 문을 닫지만, 술집은 새벽 2시까지 영업을 이어간다.
- 김싱숭 '○새○벽○두○시○함○덕○삼○십○이○' 가운데

쓰고 싶은 것들이 쌓여 있고, 오랫동안 그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비어 있는 마음이 좋다. 마당을 쓸 듯 마음을 쓴다. 마당의 잔가지를 쓸어내듯, 글을 쓰면서 마음속 자잘한 고민을 걷어낸다. 새들이 잔가지를 모아 둥지를 만들듯, 내 글이 내 삶을 지탱하는 기억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 배윤정 '숲속의 수레바퀴' 가운데

그동안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공허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드는가. 그렇다면 제주로 떠나보길. 그리고 제주버스 202번을 타고 금능 해변에서 노을을 만나보라. 나에게 그랬듯 그 노을이 당신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줄지 모른다.
- 손정은 '내 인생의 리셋 버튼' 가운데

나는 이 순간의 고독이 반갑다. 사람의 소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용한 그림자만 남는다. 바람의 그림자,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그림자, 풀벌레의 그림자까지. 밤을 찾아 여기까지 온 그림자가 하나둘 겹치기 시작한다. 그림자는 희미한 밤의 소리를 끌어안아 제주의 까만 바다로 빨려들어간다.
- 조미연 '작은 창문' 가운데

어떤 글은 내밀한 고백을 담은 일기처럼, 어떤 글은 애틋한 그리움을 전하는 편지처럼, 또 어떤 글은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시적인 통찰로 다가온다. 과거의 '거기'에서 현재의 '여기'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변화하는 우리 모두의 삶의 여정을 함축하는 "잘 도착했다"는 제목의 무덤덤한 선언은 깊은 공감과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독자들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풍요로운 문학적 경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시인 현택훈은 추천의 글에서 "제주도 한 바퀴를 돌 듯, 우리도 하루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여러 사람의 언어를 모았으니 어찌 농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책은 마음의 무게만큼 묵직하다"고 평했다. 소설가 지혜는 "각기 다른 깊이와 결을 지닌 목소리들이 고요하거나 우렁차게 발화된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나의 오늘 또한 아직은 괜찮다고 조용히 읊조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함덕32는 "이 책은 지역출판사로서 처음으로 펴낸 도서로, 작지만 단단한 시작이자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의 소중한 첫 걸음"이라고 소개했다. 

232쪽, 함덕32,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