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만남, 필연의 만남

말기 암을 앓고 있는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운동을 좋아하는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주고받은 열 통의 편지를 엮은 이 책은, 생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인간은 우연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
예기치 않은 병, 통제 불가능한 고통, 그리고 필연처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존재의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특히 나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병든 몸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 삶이 예고 없이 전복되는 경험을 한 사람이 여전히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단지 병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연성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타자 앞에서 어떻게 자기 삶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를 사유한다. 두 저자는 누구나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이야기를, 그러나 아무도 끝까지 말하기 어려운 그 이야기를, 철저히 자신의 경험을 매개로 하여 담담하고도 진실하게 풀어낸다. 그 서술은 울분이나 과장의 언어를 벗어나 마지막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내고자 하는 자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다"
같이 워크숍을 준비하던 미야노가 어느 날 문득 이 한마디를 건넨 순간부터 두 사람의 편지가, 나아가 이 책이 시작되었다. 예후가 나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가능성과 여전히 열려 있는 삶의 가능성 사이에서, 두 사람은 죽음이라는 필연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현재를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뜻을 같이한다.
하나의 갈림길에서 특정한 방향을 선택한다고 해서 도착지를 알 수 있는 외길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은 또 다른 갈림길을 낳고, 그 반복 속에서 우리는 가능성의 총체로서 '지금-여기'를 살아간다. 이들이 믿는 삶의 윤리는 필연을 인식하되 우연의 움직임을 배제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하지만 현대의학이 암 환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이러한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소노는 이를 "확률론으로 가장한 약한 운명론"이라 비판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제시하는 몇 퍼센트의 생존율이나 성공률은 그대로 운명처럼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환자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행동을 규범적으로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그렇게 환자는 "내 앞의 미래가 이러하니 이러한 길로 나아가겠다"라는 운명론적인 결정을 반복하게 된다.
이런 운명론적 경향은 병원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의서' 양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현대의학은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면 환자가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병을 앓는 사람의 관점에서 선택과 결정은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의 산물로 환원될 수 없다. 질병은 인간을 취약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의 결정은 종종 신체감각이나 정동,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희망에 휘둘린다. 선택은 언제나 능동적 행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음과 억지스러움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상태로 이루어진다.
표준 치료에 지치고 예후가 불투명할수록 많은 이들이 대체요법에 눈을 돌린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환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위장된, 조잡한 강한 운명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명확한 설명 대신 절대적 믿음을 요구하는 이 체계는 결국 환자를 또 다른 결정의 압박과 자기 책임의 굴레 속에 밀어 넣는다.
그러나 환자의 이런 선택을 단순히 비합리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확률적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은 대개 그 확률이 나 자신의 경험과 연결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때 판단은 수치가 아닌 관계, 곧 "내가 누구를 신뢰하는가?"로 전환된다. 그리고 그렇게 신뢰에 기댄 결정은 때때로 맹목적 믿음의 형태로 흐르기도 한다.
이때 미야노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결정을 정말 환자 혼자 감당해야 할까?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은 개인이 정보를 이해하고 손익을 계산하여 내려야 하는 독립적 판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 책임지게 만드는 것이 정말 옳은가? 올바른 선택을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압박에서 잠시 내려설 수 있다면, 환자와 의료인 모두 훨씬 평온한 마음으로 함께 사유하고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미야노는 의사결정이란 결국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단독적인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와 말, 정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함께 견뎌내는 일이야말로 질병과 죽음 앞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는 방식이다.
우연성, 통제의 시대에 삶을 허용하는 일
미야노는 합리성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삶의 근본적인 동인으로 '통제 욕구'를 지목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래,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는 확률과 통계를 도입하고, 그 수치들 위에 삶의 계획을 세우며, 불확실한 세계를 질서 있게 만들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연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되도록 삶의 영역에서 제거하거나 최소화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데 바로 이 통제의 욕망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에너지이며, 동시에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의 근거가 된다.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정보를 줬다는 이유로, 선택의 결과와 그에 따른 고통 역시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질병의 경우, 이러한 구조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병은 본래 우연적 사건, 원인을 특정할 수 없는 불운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흔히 그 원인을 개인의 생활 습관이나 유전적 소인 등에서 찾으려 한다. 이처럼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에게조차 책임을 묻는 일은 모든 사건에는 피할 수 있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 곧 세계는 합리적으로 통제 가능하다는 신념이 낳은 현대 사회의 비극이다.
하지만 우연의 철학자로 불리는 구키 슈조를 오랫동안 연구한 미야노는 우연을 단지 '비합리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우연이란 독립된 두 현상이 어떤 인과도 없이 조우하는 사건이며, 이는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확률의 세계와는 다르다. 확률이 말하는 것은 '가능성의 분포'일 뿐이지만, 우연은 그 가능성이 나에게 실현되는 단 하나의 충격적인 순간이다. 이 만남은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곧 필연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아야 했을 일이, 일어나지 말았을 일이, 어쩌다 보니 일어난 것, 그것이 우연이다.
그렇기에 우연은 불운일 수 있으되, 불행은 아니다. 불운은 설명되지 않는 마주침이지만, 불행은 그 마주침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의 전체로 받아들이는 순간 생겨난다. 미야노는 암이라는 불운을 맞았지만, 자신을 '암 환자'라는 정체성 안에 가둬두지는 않는다.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이유다. 불운을 이해하려 들기보다 이해할 수 없음 앞에 질문을 던지고 맞서는 힘, 그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철학은 불운과 불행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서사에 휘말리는 대신, 의미화되지 않는 현실에 저항할 언어와 감각을 제공하며, 인간이 자기 인생을 잃지 않도록 돕는다.
물론 철학이라고 해서 고통을 초월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야노는 강인한 철학자이면서도 때때로 병의 고통과 불확실성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울보 미야노'이기도 하다. 그런 순간, 불운과 불행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병에 관해 말하는 대화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를 환자라는 역할에 고정하기 쉽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중요한 것은 환자라는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삶의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병든 몸은 일상의 모든 것을 점령하지 않는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웃음과 기쁨의 순간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야노와 이소노는 때때로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이야기, 우스운 농담, 시시껄렁한 일상에서 생의 활기를 발견한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로지 '환자'라는 이름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중간한 환자'로 살아가는 자리다. 암과 일상이 겹쳐 있는 하루하루 속에서도 여전히 웃고, 생각하고, 서로에게 말 건넬 수 있는 존재로 남는 일. 바로 그 지점이 우연이라는 충격을 살아내는 진짜 의미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필연성과 미래를 향한 약속
이소노는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하나의 불문율 같은 현상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를 '상호 허위'의 규칙이라 부른다. 그것은 고통이나 두려움을 노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의례적 행위이다.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상대에게 상처 주거나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서로 눈을 피하고, 무해하고 표준화된 언어만을 주고받는다. 이 말의 외피 아래에서는 삶과 죽음의 실질적인 감각이 망각되고, 결국 대화는 형식만 남은 빈 공간이 된다. 특히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이 상호 허위의 규칙 아래에서 가장 엄격한 금기다.
그러나 미야노의 병세가 깊어지며 두 사람은 결국 이 규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죽음이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 아닌, 몸의 깊은 고통과 호흡의 어려움으로 실재화되는 곳. 그들은 마침내 죽음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그 시작은 아주 오래전, "병세가 갑자기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말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말은 하지 않았을지언정, 죽음이라는 공동의 미래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말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경계를 넘는 행위였기에, 무의식적으로 그 선을 피해왔던 것이다.
이제 미야노는 죽음이 지금 여기에 찾아왔다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다. 고통이 심해지고, 숨 쉬는 일이 고역이 되면, 죽음은 더 이상 미래의 개연성이 아니라, 몸의 현재로 침투하는 절박한 실재가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책을 기획하고, 강의를 하며, 행사를 준비한다. 죽음이 임박해도 삶은 그 일상의 리듬을 완전히 놓지 않는다.
그녀는 되묻는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깔끔하게 마쳐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 질문은 일종의 반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 미래는 언제나 미완결된 채 머물러 있다. 우리는 완결을 알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두고 '완전한 준비'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조건을 오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미야노가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여전히 일을 벌이고, 약속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모험이자 도박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누군가와 약속한다는 행위는 자칫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신뢰. 타인과 맺은 관계에 대한 믿음. 나라는 존재의 끝을 누군가 이어받으리라는 희미하지만 따뜻한 확신. 그 신뢰가 미완결의 삶을 떠맡고, 떠맡긴다.
오직 너만 자아낼 수 있는 말을 글로 남겨.
그 글이 세계에 어떻게 닿을지 지켜보기 전까지.
절대로 죽지 마.
이소노의 이 요구에 미야노는 조심스럽게 속으로 답한다. "그래, 그럴게."
그것은 "죽지 않겠다"라는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미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어지는 관계 속에서, 말과 글, 사유와 신뢰로 서로를 지지해 왔던 두 사람 사이 미완결의 연대를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다. 죽음 앞에서도 무너뜨릴 수 없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이들이 함께 살아내는 방식이며, 존재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존엄의 형태다.
점과 선들: 우연한 만남의 궤적
이소노는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라인스(Lines)'를 인용해, 암 환자와 주변인의 관계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잉골드는 인류의 역사에서 삶이 '선을 따라 걷는 운동'이 아니라, 점과 점을 잇는 효율적 경로로 환원되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그는 도보 여행과 열차 수송의 차이를 예로 든다. 걷는다는 것은 발걸음을 옮기며 세계와 마주하고, 리듬과 감각 속에서 사물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 반면 수송은 출발지와 도착지라는 두 점을 효율적으로 연결할 뿐, 수송되는 사람이나 사물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횡단 행위에 불과하다.
오늘날 의료 현장에서 암 환자를 대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암 환자와 그 주변인이 '어떻게 잘 연결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정해진 '점과 점의 이상적 거리'로 규범화한다. 그 규범은 일종의 '유사 계약'을 형성하며, 정서와 시간, 관계의 복잡한 궤적을 평면화한다. 그러나 환자의 삶은 선형적인 연결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흔들리며 나아가는 '선의 움직임', 곧 궤적 그 자체다. 그런 궤적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다음 발걸음의 근거가 된다. 그렇게 세계는 다시 입체성을 회복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은 두꺼워진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만남과 죽음, 상실과 우연이 삶의 심층에 스며든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의 의미를 찾고 살아갈 수 있는가?
미야노가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생의 마지막이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라는 일방적인 구도로 고정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너무도 얄팍하고 비대칭적인 시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존재하고 나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이 태어난다." 인간의 정체성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 속 우연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며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선택이란 우연을 허용하는 행위이다. 우연을 허용할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출현한다.
따라서 '운명을 살아간다'라는 것은 정해진 길을 걷는 일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향해 전면적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세계란 곧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진 놀라운 배열이며, 그 만남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곳임을. 이 세계는 경이롭고, 사랑스러우며, 우연과 운명으로 얽힌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그물망이다. 그리고 그 그물 위에서, 우리는 단순히 연결된 점이 아니라 함께 궤적을 남기며 세계를 통과해 가는 존재가 된다. 그런 믿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남긴 흔적을 누군가가 이어받아 다시 의미의 그물을 짜줄 것이라는 신뢰를 품는다. 그것이 미야노가 생의 마지막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요 윤리이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이소노는 정직한 직구만을 던지는 투수다. 언제나 에둘러 말하지 않고 핵심을 질문한다. 반면 미야노는 번트와 단타, 때로는 장타까지 자유롭게 구사하는 타자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담장 밖을 훌쩍 넘어가는 한 방의 홈런으로 이 긴 게임을 마무리한다. 침묵하던 관중이 웅성이고, 구장의 공기가 바뀌는 그 순간처럼, 그녀는 말과 철학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되살린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현재 프랑스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제목은 'All of a Sudden'. 직역하면 '갑자기', '뜻밖에', '불현듯'. 하지만 나는 그 제목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연의 모든 것.'
질병이라는 우연의 심연 속에서 세계를 바라본 두 사람의 시선을 명민한 영화감독은 어떤 빛과 소리, 어떤 침묵과 여백으로 스크린 위에 옮겨놓을까. 나는 미래 어느 날, 영화관 어둠 속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와 함께, 내가 아직 발 들이지 않은 우연적인 세계의 가장자리에 조용히 닿으며.

제주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교수.
한림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 박사. 의철학, 의료인문학, 서사의학 등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의료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의학과 인문학의 경계 넘기》, 《팬데믹,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공저), 《Body Talk in the Medical Humanities: Whose Language?》(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 2》(공저), 《의학의 전환과 근대병원의 탄생》(공저), 《내러티브 연구의 현황과 전망》(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