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3) 원광법사의 명성

원광법사는 신라에서 학문에 대해 이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중국 유학길에 올라 불교의 이치가 오묘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 황제의 허락을 얻어 불문에 귀의해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알아본 사람들이 원광법사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왔다. 황제까지 소문을 듣고 법사를 불러 황궁에 머물게 하며 법문을 청해 듣기까지 했다.

◆신화전설: 원광법사의 도력과 세속오계
삼국유사는 원광법사의 유학과 뛰어난 법력을 통한 신비스런 이적을 드러낸 사실들을 여러 가지 소개하고 있다.
원광법사의 제자 중에 원안은 정신이 지혜롭고 기민하였는데 천성이 두루 살펴보기를 좋아하였으며 그윽한 곳에서 도 구하기를 좋아했다. 마침내 북쪽으로는 환도에 갔었고 동쪽으로는 불내를, 또 서쪽으로는 연나라와 위나라를 돌아보았다.
그후 황제가 있는 수도 장안에 가서 각 지방의 풍속을 두루 통달하고, 불경 이론을 탐구하여 큰 줄거리를 파악하였으며 자세한 뜻까지도 밝게 알았다. 만년에는 마음의 학문으로 돌아와 세속의 도를 고양했다. 처음 장안의 절에 머무를 때 도가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서 특진 소우가 임금에게 청하여 남전에 지은 진량사에 머무르게 하고 네 가지 공양물품을 변함 없이 주었다.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이 법사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으로 모셨다. 원광법사는 황룡사에서 대승경전을 강론하면서 세상 이치를 설법했다.
또 삼국유사는 원광이 진한과 마한에서 정법을 널리 펼치면서 황룡사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강론하여 후진들을 양성했으며 시주받은 재물은 모두 절을 운영하는데 쓰니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식기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세속오계를 가르치는 과정도 기록하고 있다. 귀산이라고 하는 화랑은 사량부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과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우리들이 어진 분과 사귀려고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찌 어진 분을 찾아가서 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스승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법사를 찾아가 "속된 사람들이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데 한 말씀 해주시면 평생의 지표로 삼겠습니다"라고 가르침을 청했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잘 알았사오나 이른바 생물을 죽이되 가려서 죽이라는 말씀만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며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원광이 "육재일과 봄, 여름에는 살생을 하지 않는데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요, 부리는 가축은 죽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다. 미물을 죽이지 말라는 것은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대상을 가리라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쓸 만큼만 죽이지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계율이다"라 설명했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하여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서약하고 물러났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열심히 수련하고 싸움터에 나아가 모두 국가에 특출한 공을 세웠다.

◆스토리텔링: 원광법사의 입적
원광이 중국에서 여러 해만에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 환영했다. 신라 26대 진평왕이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하여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
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흉금에서 우러나왔다.
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 실제로는 벼슬하여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세속오계와 같이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원광법사가 바로 죽기 전에 왕이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함께 백성을 구원할 법을 남겨주기를 여러 번 부탁하자, 상서로운 조짐을 이야기해 길조가 나라의 구석까지 미쳤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9세 되는 해였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
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후 속세 사람 가운데 죽은 태아를 낳은 사람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말하기를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에 그것을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 하여 몰래 그의 묘 옆에 묻었더니 바로 그날 죽은 태아에게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쳐졌다. 이 일로 불경스런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도 모두 그를 우러러 숭배하게 됐다.
삼국유사는 또 다른 곳에 기록된 법사의 죽음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이 그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으로 모시니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론했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략하므로 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짓게 했다. 법사는 "승려가 되어 타인을 괴롭혀 이득을 취하는 일을 하기는 곤란하지만 내가 살아가고 있는 땅의 왕이 명령하시니 따르겠습니다"며 '걸사표'를 지어바쳤다.
황제가 걸사표의 글을 보고 감동하여 30만 명의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정벌했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술까지도 두루 통달했음이 알려졌다. 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 장사지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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