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지친 마음 달래줄게요"... 서울시민 '외로움' 모이는 이곳

권정현 2025. 6. 16. 08: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국 최초 외로움 상담 센터 '외로움안녕120'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외로움' 쏟아져
"외로움 당연한 감정...경청·공감이 큰 힘 돼"
지난 4월 서울 중구 신당역에 '외로움안녕120' 홍보물이 게시돼 있다. 뉴스1

서울 강서구 KT CS 염창사옥 내 '외로움안녕120'의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린다. "상사 때문에 매일 아침 출근길이 숨 막혀요." "회사에서 잘렸는데 아내는 이혼하재요. 어떻게 살아야 하죠." "온몸이 병들어 걷지도 못하는데 누구와 대화해야 할까요."

외로운 서울시민의 이야기가 모이는 것은 이곳이 외로움 전담 상담 센터라서다. 서울시는 올해 4월 전국 최초로 외로움 예방을 위해 외로움안녕120을 열고 연중무휴 24시간 전화를 받는다. 두 달 만에 상담이 6,000건을 돌파할 정도로 외로운 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지난달 20일 찾아간 외로움안녕120의 상담사들은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쏟아진다고 했다. 상담 사례도 심심함 같은 가벼운 고민부터,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등 심각한 문제까지 다양하다. 상담사 강모(51)씨는 "전화해도 되느냐며 조심스럽게 묻는 분이 있고, 받자마자 오열하는 분도 있다"며 "청년층은 취업과 인간관계, 중장년층은 가족 단절과 경제적 어려움, 노년층은 건강 문제 등 연령대별로 외로움의 이유도 다르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사회복지사나 상담 관련 자격을 갖춘 전문 상담원 14명이 24시간 교대로 근무한다.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서울시사회복지재단 내 센터에서 최대 10회 정기 상담을 제공하고, 복지기관이나 서비스도 연결해 준다.


전화 한 통이 '삶의 변화' 이끌기도

지난달 20일 서울 강서구 '외로움안녕120'에서 상담사 강모(51)씨가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권정현 기자

상담사로서 가장 큰 보람은 누군가의 삶이 변화하는 순간을 마주할 때다. 외로움안녕120 상담사들도 그런 경험들을 하고 있다. 한 50대 후반 남성은 "최근 회사에서 퇴직한 데다 이혼까지 겪어 너무 외롭다. 혼자 밥도 못 해 먹고 세탁기도 못 돌리는 내 모습이 한심하다"고 털어놨다. 강씨는 그의 말을 차분히 듣고 이렇게 답했다. "안 해본 일이니 당연히 어려운 거죠. 제가 알려드릴게요. 제일 쉬운 게 김치볶음밥인데, 그거 먼저 해보실래요?"

이후에도 네 차례 더 통화를 하며 서울50플러스센터의 어르신 일자리 사업을 소개했고,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다며 교회에 가보기를 권유했다. 그는 이런 제안을 하나씩 실천에 옮기면서 점차 일상에 안정을 찾아갔다. 강씨는 "이제 그분의 전화가 오지 않지만 오히려 외롭지 않고 잘 지낸다는 방증인 것 같아 뿌듯하다"며 웃었다.

이 외에도 면접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셔 괴롭다는 청년이 취업에 성공하고, 양극성장애를 앓아 이틀에 한 번꼴로 상담을 요청하던 50대가 정신과 약을 줄이는 등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서울시사회복지재단에서 외로움 정기 상담을 하는 박승아(52)씨는 "외로움은 결국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감정이라 방치하면 깊은 우울감으로 이어진다"며 "반대로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곤 한다"고 설명했다.


"모두 외롭지만 모두가 특별한 존재"

지난달 20일 서울 마포구 서울시사회복지재단에서 만난 상담사 박승아(52)씨는 "우리는 모두 외롭지만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권정현 기자

두 상담사 모두 사회에 따뜻한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 이 일을 택했다. 미술심리상담을 하던 박씨는 "최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휴대폰, TV 등 일방향 매체에만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며 "진짜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 일하다 3년 전 복지 현장에 뛰어든 강씨는 "치매안심센터에서 봉사할 때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눈 경험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이 일이 자연스레 끌렸다"며 미소 지었다.

상담 업무를 하다 보면 가정폭력, 직장 내 괴롭힘 등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기도 한다. 이들은 "그럴수록 중요한 건 경청과 따뜻한 말 한마디"라고 했다. 강씨는 "상담사가 부정적인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긍정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어야 한다"며 "상대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들어주고 공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씨는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분들이 많다"며 "외롭다고 느끼는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했다.

권정현 기자 hhhy@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