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이주 90년…스포츠 영웅·K-컬처 고려인 자긍심 되다
카자흐스탄 피겨 스케이팅 스타
향년 25세 별세…추모공원 조성
알마티 그린바자르 공공 시장
고려인 30여명 고려음식 판매
“할머니 때부터 이어온 전통”
강제 이주·차별 아픔 없는 세대
‘조상의 나라’ 관심·호기심 증가
청년단체 ‘MDK’ 문화 교류 활동
“말 잊었지만, 한국은 역사적 고향”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17.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고려인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로부터 90여년이 지난 현재,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사회 내에서 저마다 살아가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며 고려인 커뮤니티도 점차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강원도민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방문, 그 속에서 지내고 있는 다양한 고려인들과 만났다.

■요절한 천재, 데니스 텐
데니스 텐(1993~2018년)은 고려인 출신의 카자흐스탄 피겨 스케이팅 선수다. 1993년 알마티에서 태어난 그는 원주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민긍호 의병장의 후손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할머니 시레나 민은 민긍호의 친손녀로, 데니스 텐은 민긍호 의병장의 외고손자가 된다.
그의 성씨인 ‘텐’은 한국의 ‘정’씨를 러시아어에서 쓰는 키릴 문자로 표기한 것이다.
데니스 텐은 고려인을 넘어 카자흐스탄 모든 국민들에게 스포츠 영웅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당시 카자흐스탄의 유일한 메달리스트였다. 이는 카자흐스탄 역사상 빙상종목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었다.
데니스 텐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도 출전했으며, 종종 민긍호 의병장의 무덤을 찾기도 하는 등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018년 7월 19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중심가에서 자신의 차에 달린 사이드 미러를 훔치려던 강도에 의해 흉기에 찔려 향년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장례는 알마티 시민장으로 진행됐고, 카자흐스탄 전역에서는 3일 동안 모든 오락 프로그램이 결방되는 등 그의 죽음을 함께 슬퍼했다.
이후 그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알마티 시내에는 공원이 조성됐고, 그를 기억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본지는 지난달 알마티 현지에 있는 그의 추모 공간을 찾았다. 조형물에는 그동안 그가 선수로서 일구어 낸 업적들이 적혀 있었다. 그가 떠난지 몇 년이 흘렀음에도 일부 시민은 데니스 텐의 조각상 앞에 꽃을 놓고 가며 여전히 그를 기억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알마티 시민인 올가씨와 발렌티나씨는 “그의 죽음은 큰 비극이었다”면서 “평소에는 더 많은 꽃이 있는데, 오늘은 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한민족의 정을 느낀 그린바자르
1875년 개장한 그린바자르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한 공공 시장이다. 이 시장의 특징은 고려인들이 삼삼오오 반찬을 팔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인들이 한 공간에 다같이 모여 고려음식을 판매하는 시장은 그린바자르가 유일하다.
본지 기자가 방문한 그린바자르에는 고려인 상인 30여명이 저마다 매대에 고려음식을 진열해 팔고 있었다. 당근김치 외에도 비트로 만든 김치, 명태 무침과 비슷한 맛과 식감을 지닌 연어 무침 등 한식과 비슷한듯 조금은 다른 반찬이 한가득이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이내 상인들은 맛 좀 보라며 오만가지 반찬을 권유했다. 시장에 오기 직전 점심을 먹은 것이 후회될 정도로 낯선듯 익숙한 반찬은 하나 하나가 전부 매력적이었다.

이날 그린바자르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전 마리나씨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서 2년 동안 일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고려인 3세인 그는 이 시장에서 장사한지 10년이 넘었다. 한국요리는 고려인 1세인 그의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할머니는 전주 출신으로 5살 때 카자흐스탄에 오게 됐다고 한다.
전 마리나씨는 “고려인들이 알마티로 이주한 뒤 농사를 지었다. 농사 지은 작물로 요리를 해서 할머니들이 시장에 나와 팔았고, 이게 계속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고려인들이 그린바자르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면서 “고려인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사람들도 많이 온다. 관광을 온 한국인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도 반찬을 사간다”고 했다.

여러 반찬을 무료로 시식하게 해준데다 인터뷰까지 친절하게 응해준 그에게 조금이나마 감사함을 전하고자 당근김치와 비트김치를 한봉지씩 구매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전씨인데 당신은 정씨라서 친근감이 든다”며 한사코 돈 받기를 거부했다.
몇 분 간에 걸친 실랑이 끝에 나는 마리나 씨의 손에 텡게(카자흐스탄 화폐)를 쥐어줄 수 있었다.

■젊은 고려인들
고려인들도 세대를 거듭하며 초창기 1~2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선조들이 겪은 강제이주나 차별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다. 평생을 카자흐스탄에서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쓰며 살아왔기에 ‘카자흐스탄 국민’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젊은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조상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다. 조부모·부모 세대에게 대한민국이 가슴아픈 단어였다면, 이들에게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다.
본지는 알마티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청년 단체인 ‘MDK’와 만나 ‘MZ 고려인’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MDK는 한국과 카자흐스 탄 청년 간 다양한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양국의 문화를 공유하는 단체다. 지난 2023년 설립돼 현재까지 알마티를 중심으로 활동 중이다. 12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가입돼 있다. 고려인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인도 함께 소속돼 있다. MDK는 고려인의 역사나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 외에도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있는 K-컬처에 대한 공유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알마티 시내에서 모두가 함께 ‘K-POP’을 즐기는 K-POP STAR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MDK의 회장을 맡고 있는 막심씨는 고려인 4세다. 그의 아버지 역시 고려인이며,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 그는 고려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의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집안은 설날이나 추석 등 한국의 명절을 기념하고 있다. 한국인들도 잘 기념하지 않는 단오도 그의 집안에서는 중요한 행사라고 한다.
막심 회장은 MDK 활동 외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카자흐스탄 안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고 있다. 그는 어릴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눈치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에 착안해 ‘NOONCHI’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의류 사업도 하고 있다.
그는 젊은 고려인들이 한국어를 하지 못하게 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이러한 배경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했다. 막심 회장은 “조상들은 카자흐스탄에서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자신의 자녀가 잘 적응하도록 학교에 보냈다. 여기에서 계속 살수밖에 없으니 열심히 언어를 공부했고, 결국 모국어를 잊어버렸다”고 했다. 그도 영어는 유창하게 할 수 있었으나 정작 한국어는 간단한 의사표현만 가능했다. 비록 말은 잊었고, 국적도 카자흐스탄인이지만 그에게 한국은 여전히 또다른 고향이다.
막심 회장은 “카자흐스탄이 나의 실제(태어난) 고향이라면 한국은 역사적인 고향이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나중에 자녀가 태어난다면 꼭 한국에 같이 갈 것”이라 강조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정민엽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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