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끼니] 해창주조장 대장경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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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의 해창주조장.
'해창대장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술은 알코올 도수 82도에 750㎖ 술 한 병의 가격이 무려 2050만 원이다.
해창대장경의 가격이 터무니없고, 오 대표의 기행이 '관종' 마케팅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창대장경이 훌륭한 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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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의 해창주조장. 이 양조장이 올해 설날을 앞두고 아주 엄청난 술을 시장에 내놨다. ‘해창대장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술은 알코올 도수 82도에 750㎖ 술 한 병의 가격이 무려 2050만 원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해창주조장은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기행’을 몇 차례 벌여왔다. 2020년에는 알코올 도수 18도에 양조장 출고가 11만 원짜리 막걸리를 출시했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시장에 나오기 무섭게 사라졌다. 2022년에는 같은 18도지만 발효과정을 더 늘린 제품을 출시했다. 이번에는 양조장 출고가 110만 원. 익숙한 형태의 막걸리 통을 도자기 병으로 만들고 24K 금 한 돈으로 만든 상표까지 붙였다. 패키지 제작 비용만 70만 원이 넘었다. 이전보다 더 거센 비판과 조롱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 또한 제품 구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해창대장경’은 이러한 기행의 결정판이다. 82도짜리 소주 한 병을 얻기 위해서는 18도짜리 막걸리 60병을 증류해야 한다. 82도짜리 술 자체가 처음이라,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주류의 알코올 도수를 검증하는 국세청 산하 주류면허지원센터에서도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해창대장경은 지난 설 연휴를 앞두고 2050만 원짜리 술 한 병과 순금 30돈으로 만든 금잔을 세트로 구성해 5050만 원에 신세계백화점을 통해 판매됐다. 이쯤 되면 너무 황당해서 비판하고 조롱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기행의 중심에는 2008년부터 해창주조장을 인수해 운영하는 오병인(62) 대표가 있다. 2022년 처음 만난 오 대표는 내게 110만 원짜리 막걸리 한 통과 순금 30돈으로 만든 금잔을 내밀며 “우선 마시고 얘기하자”고 했다. 그것은 세간의 비판과 조롱을 의식함과 동시에 완벽한 기선제압이었다. “미식은 나의 종교”라는 말과 “미친놈 소리 듣더라도 세계적인 명주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신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3년 만에 만난 오 대표는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었다. 2050만 원짜리 술 한 병과 30돈짜리 금잔을 내밀었다. 82도짜리 소주 한 모금이 혀에 닿는 순간, 부드러운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혀에서 사르르 녹았다. 목을 타고 흐르는 순간은 강렬하지만 부드러웠고 그 모든 과정은 영혼을 잠식당하는 듯 몽환적이었다. 증류주를 왜 ‘스피릿(spirit)’이라 하는지 이해됐고, 지금까지 내가 마신 그 어떤 명주도 능가하는 품격이었다.
명주로 인정받는 술에는 원가 개념이 없다. 좋은 증류주는 발효라는 자연의 섭리, 시간이라는 기다림, 그리고 증류라는 인간의 경험이 결합해 만들어진다. 셋 다 값을 매기기 어려운 영역이다. 해창대장경의 가격이 터무니없고, 오 대표의 기행이 ‘관종’ 마케팅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창대장경이 훌륭한 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전통을 낮게 평가하며 ‘유리천장’을 설정하는 버릇이 있다. 오병인 대표에겐 그런 한계가 없다. 오히려 자의식 과잉이다. 아무도 도전해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도전정신으로 충만하다. 스피릿의 세계는 이런 사람들 덕분에 성장한다.
그리고 많은 소비자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대중적인 가격의 6도 9도 12도짜리 해창막걸리는 음식점과 마트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일부 골프장에서만 판매되는 15도짜리 해창막걸리는 희귀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다. 즉, 도전도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법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이럴 때도 아주 유용한 속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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