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기억이 세계를 부른다”.. 제인 진 카이젠, 비엔날레 네 곳을 관통하다
2025년 베를린·류블랴나·울란바토르·서울, 비엔날레 동시 초청
침묵을 기억으로 바꾸는 영상 설치 작업들, 다시 '이어도' 떠오른다

시간이 멈춘 자리에서, 풍경이 말을 겁니다.
그 말은 소리보다 오래 남고, 이미지보다 더 선명합니다.
제인 진 카이젠(Jane Jin Kaisen)은 그 말을 듣는 예술가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바다를 기억하는 사람.
이제 그의 영상은 세계 네 곳의 비엔날레를 지나며, 지워졌던 말과 자리를 다시 불러냅니다.
다시, 그의 기억을 만납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시각예술가 제인 진 카이젠 작가.
2025년, 베를린·류블랴나·울란바토르·서울에서 열리는 4개 국제 비엔날레에 동시 초청되며, 세계 미술계 위로 강렬한 귀환을 알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번에 소개되는 모든 작업은 ‘제주에서 촬영된 영상 설치’라는 점에서 ‘전시’를 넘어선 기억과 감각, 풍경과 역사 사이 층위를 되짚는 깊은 여정으로 읽힙니다.
카이젠 작가는 4·3과 해녀, 무속과 바리데기 신화 등 제주 고유의 기억을 영상 언어로 번역해, 침묵해온 땅의 목소리를 세계 앞에 다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풍경은 무엇을 기억하는가.”
그 질문이 지금, 2025년 세계의 여러 장소에서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 베를린·류블랴나·울란바토르·서울.. 제주 기억을 품은 영상, 세계를 돌다
제인 진 카이젠 작가는 지난 14일부터 9월 14일까지 열리는 제13회 베를린 현대미술 비엔날레에 초청돼, 탈주성과 예술의 자율성을 주제로 제도 밖의 법과 기억을 탐색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대표작 ‘할망(Halmang)’은 제주 해녀 8인의 제의적 행위를 담은 3채널 영상 설치로, 무속과 여성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억압된 시간을 견디는 존재의 목소리를 정제된 시선으로 시각화했습니다.

같은 시기 슬로베니아에서는 제36회 류블랴나 그래픽 아트 비엔날레(6월 6일~10월 12일)가 열리고 있습니다.
전시는 ‘신탁(The Oracle)’이라는 주제 아래, 판타지와 자유, 연대의 감각을 새롭게 구성하는 실험의 장으로 꾸며졌습니다.
작가는 제주에서 출발한 여성성과 장소성의 언어를 바탕으로, ‘기억의 언어’를 구축하는 미디어 설치 작업으로 참여해, 다른 작가들과 감각적·정서적 궤를 깊이 공유합니다
몽골에서는 올해 첫 개최된 울란바토르 비엔날레 2025(6~20일)에 참여하고, ‘수평선 위에서, 달빛 아래서’라는 시적 테마에 맞춰 제주에서 촬영한 영상을 출품했습니다.
도시와 산업화에 눌린 기억, 자연과 공동체의 감각을 다시 연결하는 이 작업은, 신흥 미술 현장으로 부상 중인 울란바토르의 맥락 안에서도 또렷한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는 8월 26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Séance: Technology of the Spirit’에서도 작가는 제주 4·3과 여성의 기억, 영혼과 풍경이 교차하는 고유한 주술적 시간성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그의 영상 작업은 ‘풍경과 영혼의 매개자’로서 미디어를 통해, 무속과 오컬트, 그리고 비가시적 존재들과의 교신을 시도하며 기억과 윤리의 감각을 확장해 나갑니다.
■ “바다는 말이 없고, 산은 입을 다물었다”
작가의 작업은 서정이 아니라 저항이고, 기록이 아니라 통과입니다.
4.3의 흔적이 남은 숲과 바다, 무명의 공동묘지, 굿판 위의 떨림, 그리고 몸을 중심에 둔 서사는 제주라는 장소를 초월해 전 지구적 감각으로 작동합니다.
대표작 ‘이별의 공동체(Community of Parting)’는 이미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한 세계 주요 기관에서 상영됐고 ‘달의 당김’, ‘거듭되는 항거’, ‘이어도’ 등도 모두 제주에서 촬영된 작업입니다.
이러한 작업들은 더 이상 지역의 서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영상은 정치적 폭력, 지워진 존재, 침묵의 세대들이 남긴 ‘미지의 언어’를 탐색하며, 현대미술이 다뤄야 할 윤리의 경계를 다시 묻고 있습니다.

■ 올해의 작가에서, 윤리적 미술의 좌표로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 ‘이어도’ 전시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명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올해 4개 도시 비엔날레 연속 참여는 한 작가의 성과에서 나아가, 동시대 미술이 감당해야 할 감각적·정치적 실천의 구조를 증명하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인 진 카이젠 작가는 이제 ‘기억의 언어’를 설계하는 예술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작가의 국내 초기 전시부터 함께해 온 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Artspace.C) 대표는 “제주는 그에게 단지 출생지가 아니라, 기억을 윤리의 언어로 번역해낸 장소”라며, “그의 작업이 세계 미술계에서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제주에서 던진 질문이 결국 오늘날 인류 모두가 직면한 감각적이고 정치적인 화두로 확장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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