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 군무처럼 숨 가쁘게 움직이는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

2025. 6. 15.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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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우니의 공연장에서]
관객 시선 닿지 않는 무대 뒤편의 장치들
편집자주
예술경영 현장을 20년 넘게 지켜 온 서고우니 예술의전당 공연예술본부장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는 조명기와 커튼, 무대막을 들어 올리는 배튼이 총 88개 천장에 일렬로 매달려 있다. 예술의전당 제공

극장의 붉은 막이 양옆으로 천천히 열리고 조명을 받은 세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객은 순식간에 그 세계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 찰나의 몰입 뒤에는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대 뒤편의 수많은 손길과 정교한 장치가 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출연자들만의 결과물이 아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대는 조용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고, 수십 명의 무대팀과 테크니션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그 가운데 핵심이 되는 장치가 바로 '배튼(batten)'이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는 총 88개 배튼이 천장에 일렬로 매달려 있으며, 이 쇠막대 구조물은 조명기, 커튼, 무대막은 물론 수백㎏에 달하는 세트까지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공연 중 배튼들은 도르래와 전동 시스템을 통해 정교하게 움직이며, 장면 전환을 매끄럽게 만든다.

전투 장면이 펼쳐지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서는, 수 미터 높이의 성문과 첨탑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내려오며 무대를 가득 채운다. 무거운 구조물이 천천히 제 위치에 안착하는 동안 무대 양옆에서는 깃발이 펄럭이고 병사들의 동상이 나란히 정렬된다. 조명이 붉은빛으로 변하며 북소리가 울리고 마침내 출연자가 그 사이로 걸어 나오는 순간, 전장의 긴장감이 객석까지 퍼져 나간다. 이 장면을 위해 여러 개의 배튼이 동시에 작동하고 조명과 음향, 출연자의 동선까지 모두가 치밀하게 맞물려야 한다.

오페라처럼 장면 전환이 잦은 무대에서는 회전 무대와 리프트(승강 장치) 같은 대형 장치들도 함께 활용된다. 예를 들어 오페라의 한 장면이 집 안 실내에서 진행되다가, 무대가 서서히 회전하면서 눈 덮인 거리나 궁전의 무도회장으로 단숨에 바뀐다. 무대 전면이 회전 무대를 따라 90도, 180도 돌아가며 전혀 다른 공간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새로운 장면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출연자들은 회전의 흐름 속에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등장하고, 조명과 음악도 함께 변하며 장면 전환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리프트는 무대 아래에서 인물이나 세트를 천천히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장치다. 하늘에서 내려오듯 등장하거나,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장면은 이 장치 덕분에 구현된다. 오페라에서 천상의 존재가 등장하거나 신전의 계단이 점차 솟아오르는 장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듯 인물이 무대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리프트는 무대의 깊이와 상징성을 함께 만들어낸다.


무대의 깊이와 상징성 만드는 '리프트'

조승우가 주연한 지난해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햄릿'.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해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햄릿'은 일부 장면에서 리프트 장치를 활용했다. 이은조(오필리아 역)와 백석광(레어티즈 역)이 출연한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지난해 예술의전당 제작 연극 '햄릿'은 일부 장면에서 리프트 장치를 활용했다. 이은조(오필리아 역)와 백석광(레어티즈 역)이 출연한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회전 무대나 리프트 같은 기계 장치가 주요한 역할을 하더라도, 장면 전환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다. 커다란 벽체나 소품을 빠르게 밀고 당기거나 무대 아래에서 세트를 밀어 올리고 다시 치우는 일까지, 이 모든 과정은 전환팀의 민첩한 움직임으로 가능해진다. 수백㎏에 달하는 세트가 정확한 위치에 놓이도록 밀리미터(㎜) 단위로 맞추고, 다음 장면에 방해되지 않도록 재빨리 무대 밖으로 옮기는 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잘 연습된 군무처럼 정확하고 일사불란하다. 이들의 집중력과 정확성 없이는 공연의 흐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정교한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수십 명의 기술 스태프가 각자 위치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협업해야 한다. 무대감독은 공연의 전체 흐름을 총괄하며 조명, 음향, 기계 등 각 파트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무대기계감독은 회전 무대와 리프트, 배튼 등 주요 장치의 작동과 안전을 함께 책임진다. 이들은 공연 전 수차례 리허설을 통해 출연자의 동선과 장면 타이밍을 완벽히 조율한다.

이렇게 무대 장치가 정확히 작동하는 동시에, 무대 옆 공간에서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또 다른 움직임이 시작된다. 무대 측면의 상수·하수 공간에서는 '퀵 체인지'가 이루어진다. 이곳에서는 출연자가 단 몇 분 만에 의상과 분장을 바꾸며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수십 벌의 의상과 가발, 액세서리가 정돈돼 있고, 의상팀과 분장팀이 숨 가쁘게 움직인다. 출연자의 머리칼을 만지는 손끝, 옷깃을 여미는 마지막 손길까지도 이 무대의 일부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찬란한 장면 뒤에는 늘 무대 밖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수많은 손길이 있다. 조명이 바뀌고 세트가 움직이며 출연자가 등장하는 그 순간들에는 기술과 감각, 그리고 공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 녹아 있다. 다음에 극장을 찾는다면, 그 화려한 무대 이면에서 분투하는 이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도 마음속 박수를 보내 보면 어떨까. 그들이 있어 우리가 꿈을 꾸는 무대가 완성된다.

예술의전당 공연예술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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