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탓? 사이버 공격? 스페인 ‘14시간 정전’이 보여준 위기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2025. 6. 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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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정전 사태로 스페인이 대혼란의 하루를 겪었다. 동네 마트와 경찰서는 비상이 걸렸고, 사람들은 휴대용 라디오와 손전등을 찾아 나섰다. AI 시대는 취약함을 드러냈다.
4월28일 대규모 정전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있다. ⓒEPA

4월28일 월요일 낮 12시 33분(현지 시각), 스페인 전역에 전기가 끊기던 순간, 발렌시아 근교의 작은 마을 알무사페스에 거주하는 나의 시어머니 레메 로렌테(74)는 강아지 린다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기온 21℃, 구름이 살짝 끼긴 했어도 화창한 날씨였다. 평일 한낮의 공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몇몇과 놀이터에서 공을 차며 노는 어린아이들뿐이었다.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던 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리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이 나와 있었다. 웅성거리며 대화하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을 지나 집에 도착했을 때, 레메는 나가기 전 작동시켜둔 세탁기가 멈춰 있는 것을 보았다. 안에는 빨래가 여전히 젖은 채 들어 있었다. 버튼을 눌러도 세탁기는 반응이 없었다. 전등 스위치를 켜고 수화기를 들어봤다.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았다. 옆 건물에서 구두 수선 일을 하는 이웃 카를로스를 찾아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카를로스가 말했다. “아니, 온 동네에 난리가 났는데 아무것도 몰랐어요?”

레메도 거리에 나온 사람들 무리에 합류했다. “알무사페스에만 끊긴 게 아니래, 전국에 다 전기가 나갔대.” “오늘 M이 셋째 아기 낳으러 병원 가지 않았어? 괜찮으려나?” “푸틴이 한 짓이야, 틀림없어.”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물론이고 곧 휴대전화와 인터넷도 끊겼다. 레메는 오래된 배터리 작동 라디오를 가지고 있어서 뉴스를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동차 라디오로 뉴스를 들었다.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 내용을 공유했다.

같은 시각, 동네 마트에도 비상이 걸렸다. 냉장고와 냉동고가 멈추었고 카드 결제가 되지 않았다. 현금이 없는 사람들 중 일부는 외상 장부를 쓰고 물건을 사갔지만 손님이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오자 마트는 외상 판매도 멈추고 문을 닫아버렸다.

해가 지자 마을에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가로등 불빛 없는 거리는 어둠에 잠겼고 촛불이나 손전등을 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서성거렸다. 골목을 순찰하는 경찰차의 확성기에서 끊임없이 안내가 나왔다. “전기 끊겼다고 경찰서에 전화하지 마세요. 지금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단전 신고가 넘쳐서 다른 업무가 마비된 상태입니다. 다른 큰일 있으면 그때 전화하세요.” 레메는 비교적 침착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었다. 집에 휴대용 라디오나 손전등이 없던 사람들은 밤 늦은 시각 불안해하며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뒷집에 사는 또래의 노인은 불안 발작을 일으켰다.

마을에 전기가 다시 들어온 건 다음 날 새벽 3시경이었다. 잠을 자고 있던 레메는 그 시각 간호사의 전화를 받고 깨어나 전기가 복구된 걸 알았다. 레메처럼 혼자 살면서 지병이 있는 노인들을 위해 긴급 상황 발생 시 손목에 찬 장비의 버튼을 눌러 의료기관을 호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 서비스가 있는데 정전 동안 이 서비스도 먹통이 됐다. 전기가 돌아오자마자 담당 간호사가 노인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돌린 것이었다.

정전 당시 셋째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갔던 M은 무사히 출산을 했다. 병원에 있던 비상 발전기는 긴급 수술에만 쓰여서, M의 분만실에는 전등 하나만 최소한으로 켜두었다고 했다. 레메는 “병원 상황이 어찌나 급했는지 빨리 분만을 끝내고 다른 환자를 보러 가려고 간호사가 M의 배 위에 앉아 아기를 밀어냈다고 하더라”며 웃었다. 그렇게 4.2㎏의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고, 알무사페스 주민 대부분은 또다시 발생할지 모르는 정전에 대비해 배터리 라디오와 휴대용 손전등으로 ‘완전무장’을 마쳤다고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 일부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초유의 정전 사태는 이렇게 마무리된 것일까. 레메가 사는 마을 알무사페스에서는 다행히 큰 사건 사고가 없었지만 스페인 전국적으로는 대혼란의 하루였다. 갈리시아에서 일가족 세 명이 발전기 사용 오류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고 마드리드에서 촛불 화재로 한 명이 사망하는 등 현재까지 스페인에서만 정전 관련해 일곱 명이 숨진 것으로 보고됐다. 기차 총 116대가 선로 위에 멈췄고 승객 3만5000여 명의 발이 묶였다. 냉방장치가 멈추고 물과 음식이 제한된 기차 안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과정을 오스카 푸엔테 스페인 교통장관이 소셜미디어 X를 통해 중계했다.

재생에너지 때문? 사이버 공격?

이유가 무엇일까. 이베리아반도 전체에 약 14시간의 정전을 불러온 전례 없는 사고임에도 그 원인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4월28일 10시33분께 약 5초 동안 15기가와트(GW), 스페인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60%에 해당하는 전력 손실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스페인과 프랑스 전력망이 분리되어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는 사실만 확인되었다. 유럽위원회는 정전에 대한 독립적인 보고서를 6개월 내 작성해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큰 사건이니 서두르지 않고 제대로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의지다.

정식 조사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현재 원인으로 지목되는 주요 가설로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스페인의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늘었음에도 에너지를 관리, 통제하는 전력망이 불안정해서 순식간에 큰 정전 사고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이버 공격이다.

우선 불안정 재생에너지 전력망 가설을 살펴보자. 스페인 전력회사(부분 공기업)인 레드 엘렉트리카(Red Eléctrica)에 따르면, 스페인은 지난해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57%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했고(풍력 23%, 태양광 17%, 수력 13% 등) 2030년까지 이 비율을 81%로 높인다는 계획이다. 이는 현재 유럽 각국의 재생에너지 전력 비중 평균(47%)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문제는 화력이나 원자력 같은 기존 발전 방식(터빈 회전)에 비해 재생에너지 발전 방식은 수요-공급 간 균형을 정밀하게 조절하기 쉽지 않아, 문제 발생 시 부분 단전 같은 대처를 빠르게 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이를 보완하는 장치들이 존재하지만, 스페인은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면서 장치에 대한 투자를 그만큼 하지 않아 사고는 사실상 예정되어 있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너무 서둘렀다는 건데, 이는 스페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후위기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유럽 각국은 에너지 자급에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크다. 그 수단으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늘리는 데 촉각이 곤두서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에너지 자립도가 채 30%도 되지 않는 스위스는 2024년 6월9일 국민투표를 통해 ‘재생에너지를 통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관한 연방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향후 10~15년 동안 수력·태양광·풍력 발전을 중심으로 더 많은 재생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스위스 전력 공급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알프스에 기존 수력발전소 13개를 확장하고 새로운 댐 3개를 건설할 예정이다.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고는 하나, 알프스 고산지대의 댐 건설은 사회적으로 매우 예민한 이슈다. 이 법안에 대해 전혀 다른 두 그룹이 반대를 하고 있다. 하나는 수력발전소 건설로 인한 자연 훼손을 우려하는 환경단체이고, 다른 하나는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실제 수요에 훨씬 못 미칠 테니 원자력발전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우파 세력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질수록 에너지 수급 안정성에 대한 우려도 따라 커진다. 유럽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가장 높은 덴마크조차도 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해 화석연료가 아닌 다른 수단을 마련해둬야 한다며 탈원전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2017년 국민투표로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 금지안이 통과됐는데, 최근 이를 다시 뒤집는 것을 목표로 또 다른 국민투표 안건이 준비 중이다. 이른바 ‘정전 방지 이니셔티브(No Blackout Initiative)’로, 친환경 에너지와 전력 안보를 위해서는 수력과 원자력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극우 정당인 스위스 국민당과 다른 중도 우파 세력 및 여러 기업이 연합해서 안건을 도입했다.

이처럼 에너지와 환경을 둘러싼 의견이 각축하는 상황에서 실제로 스페인 정전 사태가 발생하자 재생에너지의 급속한 확장과 탈원전에 반대하는 쪽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2035년까지 모든 원자력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던 스페인 여론의 향방도 이제는 미지수다.

다음으로 사이버 공격 가설을 보자. 레드 엘렉트리카 및 스페인 정부는 현재 사이버 공격 증거는 없다며 이 가설을 배제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스페인의 여러 소규모 전력 생산업체를 취재한 결과 이들 업체가 정부로부터 사이버 방어 관련 정보를 요구받았으며, 또 이와 별도로 스페인 국립고등법원의 판사가 정전 사태 배후에 사이버 공격이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5월13일). 당장 증거가 없다 해도 최근 몇 년간 급증하는 에너지 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감안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맞아 보인다.

구글앱 없이 살 수 있을까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연간 사이버 보안 보고서를 종합하면, 전 세계 에너지 시설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2020년에는 한 주 평균 504건이었으나 2024년 3배가 넘는 1577건으로 늘었다(〈그림〉 참조).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정치 상황, 그리고 계속 디지털화되고 있는 유럽의 전력망을 사이버 공격의 주된 동기로 꼽는다. 2022년 말 러시아의 해커 조직 샌드웜이 우크라이나의 주요 에너지 인프라 조직을 표적으로 삼아 감행한 다중 사이버 공격, 2023년 5월 덴마크의 에너지 기반 시설을 운영하는 22개 기업이 동시에 받았던 사이버 공격 등도 정치적 목적의 공격이었다.

한편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면서 중앙집중된 관리시스템으로부터 수많은 소형 관리시스템으로 전환됐는데, 이는 해커들의 표적이 늘어났다는 점에서 보안에 더 취약해진 면이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재생에너지 발전을 늘려온 스페인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격의 정치적·환경적 동기는 충분했다고 볼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이든 사이버 공격이든, 비슷한 사태가 또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이번 일로 사람들은 전기가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에 필수임을 깨닫게 됐다. 주유소의 주유 장치도 전기 없이는 작동이 안 돼 기름이 있어도 차에 넣을 수 없었다. 화장실 물내림 장치도 정전과 함께 멈춰버렸다. 휴대전화와 유선전화, 인터넷 연결망에도 연이어 문제가 생겼고,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는 거리에서는 자동차 운전도 모험이었다. 그동안 전기차로 계속 전환해온 스페인 경찰차들은 정전이 더 길어졌다면 무용지물이었을 것이다.

전기에 의존하는 건 기계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기억도 영향을 받았다. 정전 다음 날인 4월29일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 보도에 따르면, 마드리드 도심 옷 매장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이 멈춰버린 지하철 대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구글맵 없이는 방향조차 잡지 못해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구글맵, 휴대전화 주소록 없는 우리는 얼마나 독립적인가. AI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며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AI 시대의 블랙아웃에 대비해야 한다.

4월2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폐쇄된 지하철역 밖에 대기 중인 사람들. ⓒAP Photo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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