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사이 낀 숙명…李 정부 ‘실용외교’ 새 좌표 어떻게 찍힐까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2025. 6. 14. 11: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올해 ‘최대 외교 이벤트’ APEC 10월말 경주에서 개최
이재명, 시진핑 주석 APEC 초청…미·중 정상 만남 가능성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기록이 없는데 중국의 사서에 등장하는 우리 역사 속 회의제도가 하나 있다. 바로 신라의 화백회의다.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신당서(新唐書)》 '신라전'에 보면 화백회의를 일컬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모여 결정했는데 이를 '화백'이라 하며 단 한 사람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결정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장일치제 귀족 회의였던 셈인데 요즘 말로 하면 주요 인사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놓고 컨센서스(consensus)를 추구했던 것이다. 경주에는 이 화백회의의 이름을 딴 '화백컨벤션센터'가 있다. 이곳에서 올해 10월말에서 11월초 사이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G7 정상들이 2024년 6월14일 이탈리아 풀리아에서 열린 제50차 G7 정상회의에서 인공지능(AI)과 에너지 세션에 참석했다. ⓒUPI 연합

APEC의 의사결정은 화백회의처럼 컨센서스 방식을 추구하며, 비구속적(non-binding) 이행이 원칙인 만큼 회원국의 자발적 참여와 이행을 중시하고 있다. APEC 정상회의는 야유회나 워크숍을 의미하기도 하는 '리트릿(retreat)' 형식을 띠고 있어 각국 정상들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좀 더 내실 있는 협의와 결과를 도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 옛날 각 씨족과 부족을 대표하던 귀족들이 '서라벌(경주)' 인근의 산봉우리나 수풀이 우거진 계곡에 모여 합의제 의사결정을 시도하던 화백회의를 상상해 보면 현재의 다자 정상회의와도 비슷한 모양새일 것으로 추측된다. 각국을 대표하는 역내 정상들이 휴양지나 명소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합의를 추구하는 과정 자체가 여러모로 화백회의와 닮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 화백회의 본고장인 경주에 모여 APEC 회원국 정상들은 올 하반기 역내 외교의 성과를 갈무리할 수 있을까? 트럼프와 시진핑을 비롯한 주요 정상들이 경주 APEC에서 순조로운 합의에 다다를 수 있을까? 과연 시진핑 주석은 경주 APEC을 계기로 미루고 미루던 방한을 실제 할 것인가?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올해 최대 외교 이벤트가 될 경주 APEC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다. 

그 관심은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통화 직후 더욱 증대되기 시작했다. 6월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6일), 일본 이시바 총리(9일), 중국 시진핑 주석(10일)과 차례로 통화를 했고 마지막 통화 상대인 시진핑 주석에게는 특별히 경주 APEC 초청 의사를 전했다. 시진핑 주석이 방한한다면 경주 APEC은 미·중 정상이 만나는 계기로도 더욱 주목받을 것이며, 양자 사이에 '낀' 것 같은 우리 입장에서도 활로를 찾는 기회 혹은 더 좁은 길로 들어서는 기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 '기회' 혹은 '기로'의 힌트는 '안보'라는 단어를 실마리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6월10일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에서 이 대통령은 "한중 양국이 호혜·평등의 정신하에 경제, 안보, 문화, 인적 교류 등 다방면에서 활발한 교류와 협력을 추진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밝혀 주목받았다. 중국과의 '안보' 협력을 언급한 것이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한중 안보 협력 의미'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말씀 그대로이고 구체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중 안보 협력 논의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와 맥락인지는 더 파악해 봐야겠지만 일반적인 군사 협력 의미보다는 공급망 문제와 같은 경제안보를 의미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해석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시 주석도 이날 통화에서 한중 양국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에 공동 대응하자는 입장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며 역시 경제안보 차원에 입각한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은 "양자 협력과 다자간 조정을 긴밀히 하고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공동으로 유지하며 글로벌 및 지역 산업 및 공급망의 안정성과 원활함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 ⓒAFP 연합·연합뉴스

美 '고립주의',  中 '다자주의' 사이 딜레마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은 원래 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핵심 가치였으며 미국이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중국이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가 허울 좋은 미국의 역할은 그만두고 제 이익을 찾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세계 질서는 기존 패러다임이 무너졌으되 아직 새 패러다임은 오지 않은 혼란의 격변기를 보내고 있는데, 이 와중에 중국은 다자외교에 주력하며 특히 한·미·일 협력에서 가장 약한 고리로 보이는 한국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6월10일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를 복기해 보면 중국은 한국에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나 일방적 관세 정책과 대립하는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강조하면서 무역 강국 한국의 이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를 신중히 판단하라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대미 외교에 기본적인 무게중심을 두는 한국의 '대미경사(對美傾斜)'를 완화해 보려는 시도로 보이며, 중국과 공급망 안정을 협조하고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것이 한국에 더 낫지 않겠느냐는 강력한 권유를 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지근거리에 있는 한국과의 협력을 통한 영향력 유지와 이익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다. 2017년 사드 사태 이후로 한중 관계가 냉랭해지고, 미·중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이 미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해 가면서 한국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계속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26%에서 2022년 22.8%, 2023년 19.7%로 계속 하락했다. 2025년도에는 1분기 기준 18%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이 같은 경향이 계속되면 올해 안에 연간 기준으로 23년 만에 대미 수출액이 대중 수출액을 추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의미하던 안미경중(安美經中)은 오간 데 없고, 잘못하면 '안보는 미국, 경제도 미국'이 되는 상황을 중국이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5월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샹그릴라 대화'(아시아안보회의) 연설을 통해 "중국은 아시아에서 지배적 국가가 돼 지역을 지배하려 한다"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은 중국의 악의적인 영향력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긴장이 고조될 경우 미국의 의사결정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한국 등을 겨냥한 듯한 이 발언은 안보는 미국에 의지하면서 경제는 중국과 주로 거래하려는 '안미경중' 외교를 질타하는 발언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헤그세스 장관의 연설 다음 날인 6월1일 중국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진영 대결의 냉전식 사고를 퍼뜨리며 중국을 공격했으며, 도발적 의도가 가득한 '중국 위협론'을 퍼뜨렸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이 대중 봉쇄와 견제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는 변치 않고 계속될 전망이다. 헤그세스 장관의 샹그릴라 대화 연설을 보면 미국의 국가 정체성을 인도·태평양 국가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집권 1기 당시 아시아·태평양 개념을 인도·태평양 개념으로 바꾼 바 있는 트럼프 행정부다. 이번 2기 때는 유럽이나 기타 지역의 안보는 동맹국들이 국방비를 증액하거나 스스로 역량을 키워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미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겠다는 구상을 내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 구상의 끝에는 중국 봉쇄가 있다.   

이미 지난 3월 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미 국방부의 '임시국방전략지침'에서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 저지와 미 본토 방위를 최우선 순위로 명시한 바 있다. 이 지침에는 동맹국들에 각자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비 증액을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헤그세스 장관은 5월31일 샹그릴라 대화 연설에서 유럽 나토 국가들도 국민총생산(GDP)의 5% 수준의 국방비 지출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위협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강력한 중국 위협에 노출된 아시아 국가가 국방비를 나토 국가보다 적게 쓰면 안 된다고 일갈했다. 올해 GDP 대비 2.8% 수준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는 한국을 곱게 보고 있을 리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미 트럼프 행정부의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이나 스티브 미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안보와 경제가 연계되어 있고 관세도 국가안보 의제를 고려해 부과할 수 있다고 누차 밝힌 바 있다. 앞으로 다가올 관세 관련 '7월 패키지'나 그 이후에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주한미군 역할 조정론 같은 안보 이슈를 매개로 얼마나 많은 압박을 가해 올지 예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한미 동맹, 한일 협력, 한·미·일 협력을 기본 3축 체계처럼 표방한 이재명표 실용외교 노선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없고, 중국과 러시아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한미 동맹 최우선주의를 금과옥조처럼 여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게 한반도에  위치한, 영원한 '낀' 국가 한국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이나 중국 모두 한국을 필요로 할 만한 일단의 실력을 현재 우리가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산업과 제조업 역량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조건을 기초로 한국은 포괄적으로 지속 발전하고 있는 한미 동맹을 21세기형 전략적 산업동맹으로도 확대 발전시켜 나가며 미국의 제조업 생태계 복원에 기여하면서, 동시에 우리 투자 기업들의 성장도 도모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우리 투자 기업들이 미국에서 생산활동을 할 때 거기에 들어갈 소재, 부품, 장비의 공급이 현재 제조업 생태계가 훼손된 미국 내에서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미국 측에 잘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중단기적으로 이 공급이 결국 한국에서부터 이루어지거나 혹은 제조업 생태계에서 우리와 연계된 중국으로까지 협력이 확대되어 결국 글로벌 공급망의 토대 위에서 한·미·중의 상호 연계성과 호혜적 접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나가야 할 것이다.

반도에 위치한 데다 분단까지 겹쳐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연결' 아니면 '고립'일 뿐이다. 어떤 지향점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잠시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실용외교를 추구하는 한국 외교의 새로운 좌표가 어떻게 찍혀 나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