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FTA’ 앞두고 이재명 정부에 쏠린 눈
● 올해로 한일 국교 ‘환갑’ 맞아
● “한일 손잡기만 한다면 상당한 파급효과”
● 한일 FTA 재추진, 미·중 갈등 격화로 힘 실려
● 李 국익 따른 ‘실리 외교’ 표방했으나…
● 日, 2019년 文 정부 전철 밟을까 우려
아소 유타카 아소시멘트 회장은 5월 2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57회 한일경제인회의'에서 개회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일한경제협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회의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일본 재계가 교류해 온 역사 전부를 목도한 산증인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의 개회사는 무게감이 있었다. 특히 "성숙기"란 표현이 의미심장했다. 올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년이 됐다는 사실의 특별함을 함축했다. 좀 더 정확히는, 6월 22일 우리나라와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한 지 60주년을 맞는다. 우리나라는 광복과 전쟁으로 인한 과도기를 거쳐 1965년 6월 22일 일본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며 일본과 교역을 다시 했다.
앞서 우린 삼국시대, 조선시대에 일본과 각종 문물을 주고받은 역사가 있지만, 이는 일본이 우리 국권을 박탈한 일제강점기 이후 끊겼다. 한일기본조약은 이를 다시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국교 정상화'란 표현을 썼다. 조약 서명 후 양국에는 외교·영사 관계가 개설돼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그런 뒤 60년이 흘렀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환갑'이다. 인생의 진리를 통달했을 만한 시기이면서도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도 있는 나이. 혹자는 '제2의 청춘'의 시작점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가 그만큼 세월을 먹었다. 두 국가는 발전·성숙했고, 오래 지속돼 온 관계는 이제 가볍지 않다. 그렇게 만들어진 '내공'을 이젠 발휘해야 할 시기로도 여겨진다. 아소 회장은 이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과거사 문제 등 아직 풀지 못한 갈등이 남아 언제든지 양국을 갈라서게 할 수 있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반목의 문제도 뛰어넘어 미래를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데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읽힌다.
"한일 손잡기만 한다면 상당한 파급효과"
그런 의미에서 양국의 자유무역협정(FTA) 재추진은 주목받는 의제 가운데 하나다. 올해 한국과 일본이 획기적 협력을 이뤄 새로운 장을 열어가길 바라는 양국 재계는 한일 FTA 재추진을 위한 분위기를 조금씩 조성하고 있다.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도 대선 기간 중 이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하며 재추진 가능성을 열어뒀다. 우린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음에도 아직 FTA를 체결하지 못했다. 2006년 양국이 FTA 체결을 위한 협상에 한차례 나선 바 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결렬됐다. 이후 한 번도 재추진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우리나라와 일본은 올해 3월부터 중국까지 가세해 한·중·일 FTA를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는 이보다 한일, 두 나라만의 FTA 재추진에 대한 열망이 더 크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교역의 문을 완전히 개방해 빚어낼 수 있는 경제적 효과가 한·중·일 FTA보다 더 클 것이란 기대가 있어서다. 그 아래엔 한일이 중국보단 사회·문화적으로도 더 많이 닮아 있다는 오랜 인식과 유사한 기업 생태계, 구조 등에 힘입어 협력에 대한 거부감, 부작용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 깔려 있다.
특히 재계는 두 나라가 잘하는 분야가 동일하거나 연계돼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반도체가 대표적 예로 많이 회자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메모리 영역에서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일본 기업들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세계 무대에서 차지하는 입지와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화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외에도 의료, 바이오, 철강, 조선 등이 유연한 한일 협력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산업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한일 FTA 재추진은 최근 미국의 관세 조치와 미·중 무역 갈등의 격화로 안정감을 잃은 세계 시장 상황으로 인해 양국의 위기감이 동시에 고조되면서 더욱 힘이 실린 측면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 교역국에 관세를 부과하면서 시장을 혼돈에 빠뜨렸다. 여기에 고환율, 고금리 등으로 인해 국내외 금융시장도 요동치면서 우리 기업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일본 기업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혼자 힘으론 뚫기 어려울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한 상황. 한일 양국 모두 위기를 함께 타개해 나갈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최근 대내외 여건은 한일 협력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하며 "양국 협력은 경제 분야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FTA 논의로 점진적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염재호 태재대 총장도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미국 관세로 인해 더욱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럴 때 우리도 일본과 더욱 뭉쳐야 한다고 본다"며 "한일이 서로의 장점을 결합하면 굉장한 파괴력을 보일 수 있다"고 내다봤다.
가까이는 'CPTPP 가입', 멀게는 '경제공동체'
한일이 뭉쳐야 한다는 목소리는 일본보단 우리 쪽이 조금 더 크다. 우리나라에선 재계를 중심으로 일본과 한층 밀접한 경제교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을 살릴 수 있는 활로가 될 것이란 게 핵심 근거인데, 저출산과 고령화, 지역 불균형 등 양국이 동일하게 겪는 사회문제도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 갈 수 있을 것이란 확신도 더해졌다.지난 60년간 성장한 우리 경제의 변모도 자신감으로 깃들며, 이 주장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와 관련해 한국무역협회가 내놓은 세계 각국의 수출액 자료가 많은 주목을 받는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해 1~11월 대(對)세계 수출액은 6223억8600만 달러로 세계 6위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5위는 일본으로 6425억9800만 달러였다. 한일 수출액의 격차는 불과 202억1200만 달러로 이는 역대 가장 작은 격차다. 우리나라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선 "2~3년 안에 우리가 일본을 추월해 세계 5대 수출국으로 올라설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일본으로선 과거에 우리나라를 이제 막 경제의 꽃을 피운 개발도상국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겠지만, 이젠 우리나라를 협력 파트너로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여건과 분위기가 마련됐다는 의미가 있다.
협력은 일정한 단계를 밟고 점차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한일 FTA가 추진될 가능성은 낮다. 정부 간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고, 여러 사안을 세심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해서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선은 우리나라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해 한일 양국이 힘을 모으며 첫 단추를 끼울 것으로 보인다. 5월 28일 우리나라와 일본 경제계 인사들은 한일경제인회의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선행적으로 관련 단체와 협력해 한국의 CPTPP 가입을 위한 활동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CPTPP는 미국이 주도해 운영하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이 탈퇴하자 일본 주도로 바뀌면서 2018년 12월 새로 출범한 경제 협정이다. 현재 일본을 비롯해 캐나다·영국, 베트남 등 12개국이 참여하고 있고, 이들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전 세계의 15%에 달할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다.
CPTPP 가입, FTA 이후 양국은 '경제공동체' 결성까지 내다보고 있다. EU처럼 화폐를 통일하고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는 식의 한층 광범위한 협력이다. 우리 재계에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자격으로 나선 공식 석상에서 이를 수차례 제안했다. 그는 지난 5월 8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의 경제5단체 간담회에서도 "일본과는 단순한 협력 정도가 아닌, 경제공동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GDP를 합치면 6조~7조 달러로 키울 수 있고, 여기서의 1% 성장은 우리나라만을 기준으로 한 2~3% 성장보다 규모가 더 커 협력의 이익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일본과는 더욱 확장된 공급망 협력도 가능하다는 점도 주목했다.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 대통령은 최 회장의 생각에 공감했다. 이어 최 회장은 5월 27일 일본으로 날아가 이시바 시게루 총리, 고바야시 겐 일본상의 회장과 회동한 자리에서도 양국 협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기도 했다.
폐쇄·보수적인 일본 소비심리는 변수
일본을 잘 아는 이른바 '지일파' 관계자 사이에선 FTA를 비롯한 한일 협력이 제대로 시너지를 내려면, 우선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일본 소비심리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일본 국민은 자국 기업에 대한 충성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해외 기업들이 내놓은 제품에는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다. 우리 삼성전자가 갤럭시 스마트폰을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많이 팔고 있는 가운데서도 일본 시장에서만큼은 맥을 못 추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 사람들은 삼성전자가 자국의 간판 전자기업 소니를 기술력으로 추월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보복' 심리로 삼성전자의 갤럭시폰보단 애플의 아이폰을 더 많이 찾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실제 지난해를 기준으로 일본 내 스마트폰 시장점유율은 애플이 56%로 압도적이었다. 삼성전자는 5%로, 구글과 샤오미, 샤프에 이은 5위에 머물렀다.
가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기술이 좀 더 앞선 우리 전자 기업들의 제품보단, 사용법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파나소닉·샤프 등 일본 기업들의 제품을 더 많이 구매해서 쓰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2007년 일본 가전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다시 진입하지 않고 있고, 남아 있는 LG전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보단 선방하는 수준의 점유율을 기록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K-팝을 앞세운 문화 영역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업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의 이런 유별난 소비심리가 풀리지 않는다면 FTA를 통해 우리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이 열린다고 해도, 그 효과는 기대 이하의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日, '화이트리스트 갈등' 재현 우려…李는 다를까
FTA를 비롯한 한일 양국의 협력은 결국 정부 간 적극적인 접촉, 논의가 전제돼야 실현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6월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기조가 한일 협력의 향방을 좌우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이재명 대통령은 어느 국가인지를 묻지 않고 우리 국익에 따른 '실리 외교'를 표방했으나, 일본과의 관계에 관해선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아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선 이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이 된 점을 주목해 6년 전 갈등이 재현될까 우려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다수의 일본 현지 관계자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 대선을 전후로 이 대통령이 선출됐을 때 빚어질 수 있는 사태를 검토하고 예의 주시해 왔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2019년 문재인 정부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봐서다.
그 당시 일본은 우리 대법원이 2018년 강제징용 배상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반발해, 2019년 7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 조치를 내렸고, 한 달 뒤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했다. 우리나라도 이 일로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고 역시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며 맞대응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서로 간 보복 행태로 이뤄진 양국의 조치는 정권이 바뀌고 양국 정상이 만나 대화하면서 2023년 6월에야 풀렸다.
일본은 이때의 갈등이 지금 다시 촉발되면 자국 경제에도 상당한 악영향이 있을 수 있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안 그래도 미·중 무역 갈등이 격화되고 미국의 관세 조치로 경제 셈법이 복잡해진 상황에서 우리나라와의 교역에도 차질이 생기면 타격이 클 것이 분명해 보여서다. 우리 역시 상황과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재명 정부가 과연 6년 전 문재인 정부와 다를지는 6월 15~17일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이곳에서 이시바 일본 총리와 처음으로 대면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취임 11일 만에 갖는 정상 외교 데뷔전이기도 한 이 회의에서 한일 협력의 기반을 다지게 될지 지켜볼 대목이다.
김형민 아시아경제 기자 khm19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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