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연애시, 어긋난 길 위로 지나간 것들 [.txt]

한겨레 2025. 6. 1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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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연애시 l 백석의 ‘남향―물닭의 소리 4’
백석이 통영에 남긴 사랑의 자취
전욱진은 ‘그대’와 따라 걷고
그대는 이제 다른 이와 다른 길 걷고
1938년 12월 시인 백석과 화가 이인성(1912~1950) 등이 어울려 찍은 사진. 맨 오른쪽부터 백석, 이인성, 무용가 조택원, 의사이자 수필가인 정근양. 이인성이 직접 운영하던 대구의 아르스 다방에서 찍었다. 이인성의 아들 이채원씨가 한겨레에 제공했던 사진이다.

흐린 날이다. 올려다본 하늘이 내내 우중충하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어디서 물큰 개 비린내가 온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예감하는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더 선명한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을 감각하는 방식이 언제나 이와 같다고 여긴다.

좋아하는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는 일념으로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를 찾았다. 이곳은 그가 사랑한 사람이 살았다는 곳. 그리하여 북관(北關)에서 난 시인은 그이를 보기 위해 누차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백년 전, 그가 이 연안을 거닐며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라고 중얼댔구나. 파도처럼 번성하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천 리가 넘는 긴 여로도 마다하지 않고.

그 시인 따라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요리조리 걸터앉아 볼 때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곧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급히 사당집으로 향해 처마 밑에 서서 비를 구경하는데, 어떤 두 사람도 서둘러 달려와 나하고 한 지붕을 공유한다. 가만가만 속삭이는 걸 보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그때 그중 한 사람이 어딘가 향하더니 잠시 후 붉은 우산을 쓴 채 되돌아온다. 이제 남아 있던 한 사람도 그리로 뛰어 들어가고 그렇게 다시 둘이 되어 멀어진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맞구나. 뒤집은 능소화를 이고 가는 연인을 바라보며 나도 한 우산 아래 곁을 두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이의 집으로 이어지던 길 위에서 어떻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할까 고심하던 무렵. 지나가다 풀벌이 보이면 거기 주저앉아 네잎클로버를 하릴없이 찾은 일, 풀잎과 함께 무심스레 전할 서간의 구절을 밤새 궁리한 일, 그 편지에 이제 너 혼자 아름다워하는 것은 없다고 선언한 일, 누가 보아도 엄연한 벽 앞에 서서 기꺼이 열린 문이 되어 준 일, 따라서 함께 너머로 가자 제안한 일. 그러니까 사막이나 북극에서 혼인한 이들같이 서로밖에 모르며 열심히 살던 시절.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에 가닿을 동안, 나의 시인도 이러한 나날을 기대했을 것이다. 한세상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사모하던 이는 결국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고 대신 그의 절친한 친구를 택하고 만다. 시인의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머릿속에 윤슬처럼 거듭 반짝이는 날들이 있어, 하루는 그이의 집 주변을 무연히 서성인 모양이다. 그때 시인은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이렇게만 썼다. “이 길이다”. 자신의 운명과 어긋난, 그 길 위를 지나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화목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의 앞날이 이처럼 평안하고 조용하기만을 바라며.

백석이 ‘란’이라 부르며 연모했던 통영 여인 박경련(오른쪽, 1917~?). 백석의 친구 신현중(왼쪽, 1910~1980)은 백석이 먼저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937년 박경련과 혼인해 몇해 뒤 통영으로 간다.

그로부터 약 일백년 후의 하늘이 어느덧 희붐해지자, 이제 밖으로 나서서 그가 망연히 응시했을 길 위에 선다. 이 길이다. 우리가 엇갈린 뒤 지금의 내가 있는 곳.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 본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 “허리도리가 굵어 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하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언젠가 아주 잠깐 한길로 다시 만나 이러한 이가 그러한 것이 이 길을 지나갔다고, 이야기해 줄 때가 오겠지. 그러고는 또다시 나뉘는 앞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바치는 일, 그 불가사의한 꿈을 우리가 반복한다는 사실에 내내 의아해하면서.

그렇게 하루는 뒤돌아본 길 위로 눈 하얗게 쌓인 날도 있겠다. 그리고 그런 날, 백년 전 나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부터 이 노래는 태어난 것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큰따옴표 안에 담은 문장은 모두 백석의 시와 산문에서 가져왔습니다.)

전욱진 시인

전욱진 시인 l 201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여름의 사실’ 등이 있다.

이제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을 들을 차례. 작가들이 숨어 애송하는 연애시의 내막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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