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축복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2025. 6. 14.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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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 대통령 서거 10주기 세미나 발제문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대한민국에 축복을 내리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집권12년동안 그는 대한민국에 어떠한 축복을 내렸기에 건국70년만에 대한민국이 세계10대강국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을까? 한미동맹이라는 안보철벽을 구축한데 더해 경제발전을 위해 어떤 축복을 내렸기에 기적과 같은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농지개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토대를 세우다

경제적 자유를 중요시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인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농지개혁은 경제적 민주혁명이자 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제를 해체한 최초의 농노해방이며 진정한 신분차별 철폐였다. 기존에 땅을 소유했던 귀족과 지주, 국회의원의 반발을 예상하고 미리 농민총연맹을 결성하도록 하여 투쟁하였다. 마침내 1950년 3월 10일 농지개혁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정부는 농지개혁을 단행한다. 또한 농지개혁은 진정한 친일파 청산이었다. 당시의 친일파는 거의 모두가 귀족과 지주였는데 그들의 3ha이상의 농지를 모두 유상이지만 강제로 몰수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농지 대금을 현금이 아닌 채권으로 분배했기 때문에 더욱 반발이 컸다. 이 채권은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이루면서 산업자본으로 활용되어 그 가치가 더욱 커졌다.

가장 큰 신의 한수는 1950년 5월 6.25 발발 직전에 ‘분배농지예정통지서’를 전농민에게 발급 • 배포한 것이다. 분배농지예정통지서 덕분에 농민들은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자신의 땅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전쟁이 나고, 공산당의 선전과 사탕발림이 있어도 지켜야 할 내 소유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과 채권 분배를 통한 산업자본의 구축, 농민의 안정적인 경제생활이라는 실질적인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바라던 ‘경제적 자유’로의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1년 소작료(산출의 50%)의 3년 납부 조건만 충족하면 소작농이 자작농이 될 수 있었고, 이로써 단 3년 만에 전 농지의 95.7%를 자작농이 소유하게 된, 세계적인 성공사례였다. 해외에서도 역시 농지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해외는 자작농 비율이 대부분 50%를 넘지 못했고 5년 후 자작농이 10%로 떨어져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이 한국처럼 농지개혁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 왔다며 한국의 농지개혁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100년 대계, 교육을 통한 국가 부흥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이 교육의 중요성을 잘 알고, 그를 통한 힘을 기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세계 유일의 아이비리그 3개 대학의 학사-석사-박사라는 기록을 세운 것 또한 이러한 그의 신념에 기인한다. 해방 직후 한국의 문맹률은 78%, 전문학교이상 고등교육을 이수한 자는 0.2%(8000명)에 불과했다. 대통령 취임 직후 그는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대한민국의 번영을 보장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초등학생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1948년 14%의 취학률을 1960년 86%까지 끌어올렸다. 또한 전국에 초,중,고등학교 및 대학교를 설립하여 학생 수를 늘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60년에는 초등학생 수가 4,600여 학교 360만 명으로 늘었고, 중학생은 53만 명에 육박했다. 대학교는 해방 당시 20곳에서 1960년 63개 학교에 학생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6.25 전쟁 중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개혁은 멈추지 않았다. 피난통에 밥을 굶어도 아이들 손에는 책이 들려져 있었다. 교과별 이수 시간제를 실시해 중단 없는 면학을 독려하고, 북한 피난민 학생들은 별도 교실을 운영했다. 또한 전시생활에 필요한 교재를 3회나 발간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혁명은 획기적인 해외유학생 파견으로 이어졌다. 정규유학생, 기술훈련유학생, 군사학교파견유학생, 산업연수생 등 2만명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했다. 인재양성정책은 1960년 이후 고도성장기에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른바 ‘이승만키즈’들이 성장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공업과 원자력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발견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이후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미국에 파견해 훈련받게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인재들은 그곳에서 발전된 과학기술을 흡수하여 전후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한 귀중한 고급인력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어 미국 원자로제작업체인 GE사로 기술자를 파견, 교육받게 했다. 1958년에는 인하공대와 한양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하여 오늘날 세계 6위 원자력기술의 토대를 닦았다. 이 대통령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교육입국과 공업입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전후 복구의 초석이 될 기계 · 금속 · 조선 · 화학 · 광산 · 전기 등 6개 공학과를 인하공대에 개설했다.

1958년에 6.25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력과 경제가 회복되자 한국 정부는 1958년 4월경제개발계획을 전담할 산업개발위원회를 발족했고,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4월 19일 ‘제1차산업개발3개년계획’과 ‘제2차산업개발3개년계획’ 등 총 6개년계획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다. 제1차 및 제2차 산업개발3개년계획은 장기적인 과제로서 국가 주도하에 공업발전, 수입대체 및 수출진흥에 주력하는 계획이었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제1호 공장인 충주비료공장을 건설하여 미국산 비료를 수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충주비료공장은 농업에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화학공업 발달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국가주도 산업화정책과 산업개발계획의 기획과 구상은 박정희 정권이 계승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승계, 확장되었다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앞당긴 산업개발과 원자력정책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에서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논평: 이승만의 정치적 업적/복거일 작가

복거일 작가

신철식 이사장이 발표한 <이승만의 축복>은 이승만 대통령의 많은 업적들 가운데 주로 경제적 성취를 다루었다. 짧은 글에서 농지 개혁, 교육에 대한 투자, 산업발전과 같은 그의 두드러진 업적들을 간명하면서도 충실히 설명해서, 초기에 우리 사회의 경제발전에 공헌한 요소들을 잘 밝혔다.

실제로, 한국전쟁 뒤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의외로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높다. 1954년: 9.5%; 1955년: 5.6%; 1956년: 0.6%; 1957년: 9.4%; 1958년: 6.6%; 1959년: 5.6%.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경제적 성취는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적 및 사회적 안정을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안정되지 않은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나라를 이끈 기간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안정했고, 1950년 여름부터 세 해 동안은 20개국이 넘는 나라들이 참전한 국제 전쟁인 한국전쟁을 치렀다. 이 비참한 전쟁으로 거의 모든 사회적 자산들이 파괴된 상황에서 이런 경제적 성취가 나왔다는 것을 새겨야 비로소 우리는 이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

1950년 초에 북한 지도부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긴 전쟁’으로 여겨서, 만주 국경에 중공군을 배치하겠다는 중공 지도부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일화는 당시의 위태로운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낙동강 전선으로 밀렸을 때, 미국 대사는 제주도에 망명 정부를 세우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덕분에 마음이 흔들리던 미국외교관들과 장군들이 마음을 다잡고 공산군과 싸웠다.

그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에, 우리는 한국전쟁에서 끝내 침략자들을 물리쳐서 우리 대한민국의 일체성을 지켜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리인 자유민주주의이념과 시장경제체제를 충실히 추구해서 나라를 재건하고 발전시켰다. 여기에 이 대통령의 궁극적 업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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