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빠른 예언자

김동식 소설가 2025. 6. 1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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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두 수’ 앞 내다보는 무속인
선택의 갈림길, 당신이라면?
일러스트=한상엽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군대 말년 휴가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제대 후 거취 문제로 심각한 고민 중이었습니다. 창업하는 선배를 따라가느냐, 대학교에 남느냐. 어떤 선택이 맞는 건지 알 수 없었죠. 동네를 배회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건널목 앞에서 웬 아저씨들이 말을 걸었습니다. “근처에서 혹시 색동옷 입은 남자 못 보셨나요?” “예? 아뇨….”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했는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엿듣게 된 대화의 내용은 “용하디 용한 무속인이 이 동네로 이사 왔다” 같은 희한한 말이었습니다. 용한 무속인? 문득 제 고민도 풀어보고 싶다는 잡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진짜로, 굴다리 밑을 지나가다가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색동옷을 입고 얼굴에 분칠한 아저씨를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그 용한 무속인이란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걸게 돼버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를 돌아본 무속인은 기계처럼 전혀 표정이 없었습니다. 무슨 용기였는지, 저는 다짜고짜 제 사연을 혼자 떠들어대며 물었습니다.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퇴해야 하는지, 아니면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지. 아무 말도 안 해줄 것 같던 무속인은 놀랍게도 입을 열었습니다. 다만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사지 마.” “예?” “사지 마.” “사지 말라고요? 선배를 따라가지 말란 말인가요?” “사지 마.”

뭐라고 물어도 돌아오는 건 오직 “사지 마”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별수 없이 저는 혼자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지 말라는 건 부정이니까, 하지 말라는 뜻이겠거니. 결과적으로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그 선배는 쫄딱 망했거든요. 따라갔다면 똑같이 망할 운명이었던 겁니다. 근데 더 놀라운 것은 몇 년 뒤의 일입니다. 당시 사회 초년생이던 제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는데, 사촌 형의 자동차를 인수하느냐 마느냐였습니다. 주차할 곳도 없고 돈도 모아야 하니까 참을지, 아니면 싸게 살 기회니까 과감하게 사 버릴지. 그런 고민으로 거리를 걷던 저는 또 그 색동옷 무속인과 만나게 된 겁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무속인과의 만남이 반가웠던 저는 또 가서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주마등 스치듯 기억이 떠오른 겁니다. 무속인이 “사지 마”를 반복하던 그날의 기억이 말입니다. 살까 말까, 자동차를 두고 고민하던 와중에… 어라?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무속인에게 저는 홀린 듯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그때 ‘사지 마’라는 말이 그 뜻이었던 건가요? 지금 이 차를 사지 말라는?” 그러자 무속인은 말했습니다. “낳지 마.” “예?” “낳지 마.”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설마 이 무속인은 미래를 내다보고 내가 할 질문의 답을 한 발 먼저 말해주는 걸까? 이번에 내가 차를 살지 말지 물을 걸 알고 저번에 “사지 마”라고 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낳지 마.”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무속인과 헤어진 뒤, 저는 무척 찜찜해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상상은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잖습니까? 고민은 됐지만, 그냥 사촌 형의 차를 인수해 버렸습니다. 솔직히 사회 초년생 때 자차 욕심은 막기가 힘든 것이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운전대를 잡고 한 달 만에 차가 반파될 정도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천만다행히 심각하게 다치진 않았지만, 병원 침대에 누웠을 때 그 무속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 일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여자친구가 혼전 임신을 해버린 겁니다. 아직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저희 커플은 몹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특히나 제 고민은 더 컸습니다. 몇 년 전 무속인이 “낳지 마”라고 미리 답을 준 셈이잖습니까? 사지 말라던 차를 샀다가 반파 사고가 났는데, 이 아이를 낳는다면?

두려웠습니다. 저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제가 믿음을 주지 못하니 여자 친구도 흔들렸습니다. 여자 친구도 혼란스럽고 저도 확신이 없다, 그럼 이 아이는 낳아선 안 되는 아이였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은 돈 없는데 아이 낳는 건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좀 더 자리 잡고 돈도 좀 모은 다음을 기약하는 게 합리적인 결정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두려워도, 험난한 미래가 뻔해 보이더라도, 솔직히 저는 낳고 싶었습니다. 그저 용기가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작은 용기만 주어진다면, 누군가 저를 한 뼘만 밀어준다면 저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또 그 무속인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저는 여자 친구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낳자. 어떻게 되든 무조건 낳자.” 여자 친구는 망설였지만, 확신에 찬 저를 믿어줬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고민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를 어떻게 낳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일이 예정돼 있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입니다. 물론 사실은, 그 무속인이 무척 큰 용기를 주기는 했습니다. “아이를 낳을까요 말까요?” 제 고민을 들은 무속인은 말했습니다. “20년 동안 매달 나눠서 받아.” “예?” “20년 동안 매달 나눠서 받아.” “그게 무슨… 아!” 그날 이후 저는 매주 연금복권을 사고 있습니다. 20년에 나눠서 받을지 아니면 일시금으로 받을지, 고민하게 될 그날이 분명 찾아올 테니 말입니다.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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