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광주 고봉로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도로명 속 남도 역사인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고봉로'가 4개나 나온다. 광주 광산구를 비롯하여 경기도 고양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경남 고성군에도 있다. 이중 광주와 일산의 '고봉로'는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을 벌인 유학자 고봉 기대승과 관련이 있는 도로명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고봉로'는 행주기씨들의 관향(貫鄕)인 행주(고양시)의 속현인 고봉 때문에 만들어진 도로명이고,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고봉로는 그가 자라고 묻힌 곳이 광주 광산구이기 때문이다. 기대승이 아호로 썼던 고봉(高峰)은 행주기씨들의 관향인 고봉에 있는 고봉산(高峰山, 203미터)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광주 고봉로는 광산구 흑석동 흑석 4거리를 기점으로, 하남동과 임곡동을 경유하여 장성군과 경계인 광산동 오룡교까지를 잇는 도로로, 총연장은 7천,520m이고, 폭은 13~15m다.
흑석 사거리에서 광산동으로 가는 길 왼쪽은 황룡강이 흐르고 오른쪽은 판사등산(343미터)인데, 판사등산 자락에 기대승을 모신 월봉서원도, 묘소도 있다.
#퇴계 이황과 120통의 편지를 주고받다
과거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은 1558년(명종 13),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을 찾아 뵙고 이황의 사단칠정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 이황은 기대승보다 26세 많은 58세였고, 지금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몇 달을 고민하던 퇴계는 고봉의 의문 제기에 자신의 학설을 수정하는 편지를 보낸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의 생각에도 스스로 전에 한 말이 온당하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겸기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고 고쳤는데,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단과 칠정의 관계 설정은 당시 성리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퇴계의 편지를 받은 고봉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인데 사단은 이로, 칠정은 기로 분리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는 편지를 퇴계에게 보낸다.
그는 이와 기는 분리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은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가치 지향적이며 이기이원론적인 입장의 이황과는 달리 논리 지향적이며 이기일원론적인 입장이다. 이후 퇴계와 고봉은 12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에 걸친 사단칠정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당시 고봉과 퇴계의 논쟁은 선비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았던 편지는 더 이상 둘만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편지를 전달하며 베끼고 돌려본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견해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왜 다른지"를 토론한다.
그리고 윤원형, 이량 등 외척의 전횡에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던 사림에게 학술과 공론의 장을 제공하는 청량제가 된다. 아홉 번이나 장원 급제한 당대의 천재 이이도 1564년(명종 19), '논심성정'을 짓는데 그 동기가 '왕복서간'에 있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고봉 기대승은 누구인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그는 이황, 이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광주가 낳은 세계적인 성리학자다. 21세기 기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은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의 승자는 단연 고봉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늘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 이황과 이이는 있지만, 기대승은 없다. 이황을 모시는 안동의 도산서원은 대부분 알고 알지만 기대승을 모시는 광주 광산동의 월봉서원은 아는 분은 많지 않다. 왜 이황은 있고 기대승은 잊힌 존재가 되었을까? 이는 너무 빠른 고봉의 죽음 때문은 아닐까 싶다.
퇴계 이황(1501~1570)은 70세까지 살면서 유성룡·김성일 등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지만, 46세에 요절한 고봉은 제자들을 길러낼 여유가 없었다. 고봉의 꿈도 제자를 기르는 것이었다.
그는 44살이던 1570년(선조 3), 잠시 고향에 내려와 고마산 남쪽에 낙암(樂庵)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할 꿈을 꾼다. 그가 집에서 가까운 고마산 기슭에 조그마한 초암을 짓고, 붙인 편액 '낙암'은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낸 "가난할수록 더욱 즐길 수 있어야 한다(貧當益可樂)"는 편지글 속 '낙'자를 취해 단 이름이었다.
'낙암'은 지었지만, 기대승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바로 선조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한양 길에 올랐고, 1572년(선조 5) 9월 마지막 받은 관직이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이었다. 기대승은 병으로 대사간 사직한 후 낙향하는데, 온 조정이 와 전별하였다.
천안에 도착한 후 볼기에 종기가 났고, 태인에 도착한 후에는 더욱 악화된다. 이때 고부에 살던 매당 김점이 급히 문병을 하자 "그대의 집에 내 며느리가 있으니, 그대의 집은 우리 집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그대의 집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하였다. 일재 이항의 문인이었던 김점은 기대승 큰 며누리의 부친이으니, 기대승과 김점은 사돈 관계였다.
고봉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그대가 태인현에 도착하여 볼기에 종기가 나고, 또 상기증(上氣症,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상)까지 앓고 있다고 하니, 실로 내 마음이 아프다. 이에 의관 오변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내려가게 하니, 그대는 약을 복용하고 조리하도록 하라"는 글을 보낸다. 그러나 어의 오변이 도착하기 전 고부 김점의 집에서 숨을 거둔다.

#서울 출신인가? 광주 출신인가?
'고봉전서'에 수록된 '고봉선생년보'를 보면, 기대승은 "1527년(중종 22) 전라도 광주목 소고룡면 송현동(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고 기술되어고 있다.
그런데 기대승이 찬한 아버지 '참봉부군묘기'에는 "한성부 청파 만리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난 후 4살 때 광주 고룡면 금정마을로 이사하여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광주로 낙향했는지,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미 살핀것처럼 '고봉선생연보'의 기록과 '참봉부군묘기'의 기록이 조금 다르기 때문인데, '고봉선생년보'에 따라 광주 출생으로 보고 싶다.
원래 기대승의 부친인 기진(奇進)을 포함한 기대승의 행주 기씨 선조들은 대대로 한성부에 살았다. 그런데 1519년(중종 14) 발발한 기묘사화로 기대승의 작은 아버지 기준이 죽임을 당하자, 그의 부친 기진이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처가의 별업(휴양을 위해 마련한 집)이 있는 광주로 이사를 온다. 고봉 기대승이 광주에서 태어나게 된 연유다.
고봉은 어린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연표'에 의하면 "5~6세에 이미 어른처럼 의젓했다"는 기록도 있다. 11살 때 향리의 서당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서당 훈장인 김공집은 고봉이 육갑(六甲)과 상생(相生)의 이치에 능통한 것을 보고 "너의 계부(季父) 덕양(기준의 호) 선생이 성리학을 궁구하여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네가 역시 가업을 계승하는구나"라며 감탄한다.
이어 '식(食)'자를 부르며 연구(聯句)를 짓도록 명하자, 고봉은 "밥 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라고 답하니, 크게 칭찬한다.
기대승은 1558년(명종 13)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낸다. 관직에 나아간 14년 동안 그는 늘 대신과 외척의 경계와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고봉집과 간추린 '주자대전'이라 불린 '주자문록', 경연에서 그가 말한 것만 뽑은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인 '논사록' 등이 있다. 그 책들은 당대 큰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여전히 뭇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성리학의 이론가 기대승',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 '기대승이 들려주는 사단칠정 이야기' 등이 책으로 나와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고봉과 퇴계의 아름다운 만남'이 창작극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를 배향한 월봉서원은 1578년(선조 11) 신룡동 고마산 남쪽의 낙암터에 망천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진다. 임진왜란 후 동천(산월동)으로 옮긴 뒤인 1654년(효종 5) 사액을 받지만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고 만다. 1941년 복원이 추진되면서 그의 무덤이 있는 광산동 너브실(광곡 마을)에 빙월당을 비롯하여 사당과 장판각, 내·외삼문 등이 차례로 완성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춘다. 고봉의 인품이 묻어있는 빙월당 현판만은 동천에서 가져온다.

#이이와 이황의 고봉 평가
당시 고봉이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는 이이와 이황의 다음 평가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대승은 젊어서부터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넓게 보고 강하게 기억하였으며 기품이 호걸스러워 담론하는 데 있어 좌중 사람들을 능히 복종하게 하였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뒤로는 청렴한 이름이 났으므로 선비들이 추대하여 영수로 삼았고, 대승도 또한 한 시대를 경륜하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율곡 이이가 쓴 '석담일기'의 내용이다.
선조 3년(1569), 낙향하는 이황에게 선조가 학문에 조예 깊은 선비를 추천해달라고 조른다. 그러자 이황은 "학문에 뜻을 둔 선비는 지금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도 기대승은 학문을 널리 알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그와 같은 사람을 보기가 드무니 가히 세상사에 통달하고 실행력이 있는 유학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주저 없이 김성일·유성룡 등 널리 알려진 영남의 수제자들을 제쳐두고 기대승을 추천한다.
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당시를 살았던 사관의 몫이다. 사관은 '선조실록'에 그의 '졸기'를 쓴다. "이 사람은 뜻이 높고 일에 과감하였으며 선악의 호오를 분명히 하였고 널리 배우되 옛 것을 좋아했으며, 문장도 뛰어나서 가히 보배로운 그릇이요 세상에 드문 인재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너무 강직하고 과대하여 말을 쉽게 해서 기로들을 악평하여 구신과 대신들에게 큰 미움을 사서 훌륭한 기개를 펴지도 못하였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