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토론장에 나타난 일베식 ‘트롤링’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별수 없이 다시 토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서두를 이렇게 꺼낸 이유가 있다. ‘미디어 레퀴엠’ 연재 초기에 한 번 전적으로 토론에 할애한 글을 썼던 건 개인적으로 지상파 방송이라는 주류 무대에서 물러나 비주류 신생 영역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기록과 평가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으로든 후로든, 비록 쇠락해가고 있으나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요 미디어 이벤트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한, 미디어 토론에 관련된 언급을 일부러 피하기는 했다. 다년간 주요 방송 토론을 진행해온 사람으로서, 그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기는 해도, 그에 관련된 직접적 언급을 삼가는 것이 일종의 상도의(?)이자 직업윤리인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토론 진행자는 되도록 ‘무색무취’여야 하고 특정한 견해를 가진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꽤 광범위한 인식이 있다. 실상에선 수준 높은 공평무사함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자신의 편향성을 충족시켜주지 않는 진행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인 경우가 태반이라,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 진행자에게서 어떤 성향이 너무 뚜렷하게 느껴지면, 특히 토론 자체에 연관된 공개적 발언을 할 경우, 그가 담당하는 토론 실무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개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적어도 토론 현장 안팎에서는 내용보다 (발언 기회와 시간 등의) 형식을 관리하는 데 치중할 필요가 있고, 내용에 간여하더라도 (논리와 근거 같은) 상대적으로 형식적인 요소에 국한하여 언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토론 진행자는 토론자들의 발언을 틔우고 조절하는 사람이지 토론을 빌미로 자기 말을 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 현장을 벗어나면 진행자 역시 한 명의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당연하며, 그런 각각의 발화 조건에 충실히 발언한다면 그것이 문제시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학술 세미나 장에서는 연구자로서, 사회현상 분석의 장에서는 분석가로서, 비평의 장에서는 비평가로서 독자적인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장에서 낸 개별 발언조차 문제 삼아 편향성을 운운하곤 한다. 이 또한 대개는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꼬투리’는 언제나 잡는 자가 잡힌 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유리한, 말하자면 넉 점에서 다섯 점 정도는 깔고 가는 바둑과도 같다. 꼬투리의 내용이 아니라 꼬투리를 잡힌 것 자체가 결정적인 꼬투리가 되는 사회라서 그렇다. 따라서 토론자에게건 대중에게건 가능한 한 선입견을 안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토론 진행자의 윤리처럼 받아들여지며, 최소한 직업적 자기관리의 핵심 내용으로서 (종종 제작진에 의해서도 묵시적으로) 요구되곤 한다.
공적 기능 망치는 망나니 후보자
나도 대체로 그랬다. 개인적 성정으로든 애초 몸담은 직업으로든 무색무취와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래도전통을 지닌유력 프로그램의 얼굴로서 쓸데없는 시비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다만 내가 견해를 가질 필요가 있고 스스로 어설프지 않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에는 토론 현장 바깥에서 언론 및 사회문제의 연구자이자 비평가로서 내어야 할 견해를 숨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토론 주제와 질문의 선정, 토론자의 구성 등에서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자 노력했다. 공정과 균형은 테두리와 기준이 있어야 작동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테두리란 ‘민주적 한계’이며, 그 기준이란 ‘근거와 논리’였다. 공화정의 헌법이 그어준 선이 민주적 한계이고, 근대 계몽사상 이후로 합리주의적 태도가 발전시켜온 논증의 방법이 기준이었다. 민주적 한계를 벗어난 주제와 입장은 공론의 장에 들어와서는 안 되며, 논증이 아닌 궤변이나 고함은 제압되어야 마땅했다. 토론 현장 안팎에서 이런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저 토론 진행자라는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걸 이용해 다른 사심을 충족하려는 동기에 잡아먹힐 뿐이라고 여겼다.
마치 평균대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 짧지만은 않았던 주류 미디어에서의 내 사회 실험은 그렇게 시작해, 한동안 그렇게 지속됐고, 언제부턴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종료됐다. 그 덕분에 지금은 방송법이 규율하는 방송 토론이나 선거법이 설정하는 선거 토론 부류에 간여할 일은 사라졌다. 상당 부분 ‘우물에 독 타기의 오류’에 가까운 이른바 ‘공정성 시비’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워진 셈이니, 이제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이번 대선 TV 토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아니 오히려 전현직 토론 진행자이자 미디어 연구자로서, 나의 공정성에 관련된 그 어떠한 시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단언컨대 이런 구태스러운 선거 이벤트는 이제 소명을 다했다. 그나마 남은 소명이라도 지키고자 한다면 그 바닥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토론의 공적 기능을 망쳐버리는 망나니 후보자가 공론장에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더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TV 토론의 공적 가치는 선거 시기에 더욱 강조되는 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특히 내란과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선거라서 유독 더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내란범 단죄는 일단 형사 법정에 맡겨둔 채, 민주공화정 내부의 진보와 보수가 공동의 정치 과제로서 헌정 수호와 개선을 논하면서, 그것을 향한 각자의 경쟁력을 다투어 입증해도 부족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한편에서는 ‘민주적 한계’를 벗어난 목소리가 마치 정상적 공론의 일부인 것처럼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베식 ‘트롤링’이 새 정치의 탈을 쓴 채 공화정의 언어를 심각히 오염시키고 있다.
과거에도 TV 토론은 늘 어딘가 불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뭇 위험해 보이는 견해가 없진 않았어도 그럭저럭 민주적 한계 안에서 움직였고, 그나마 논변의 허울이라도 갖췄다. 물론 3년 전 치른 대선에서부터 그 기미가 엿보이긴 했다. TV 토론을 이래저래 피하려다가 결국 손바닥에 ‘왕(王)’ 자를 그리고 나왔던 건 그 후에 벌어질 무속 정치의 전조이긴 했지만, 극단적 정치관과 혐오적 언행은 아직까진 페이스북 포스팅 수준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2025년의 대선 TV 토론은 모처럼 선명해졌던 민주적 한계를 도리어 더 흐릿하게 바꿔버렸다. 급기야 특정 후보자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여성혐오적 발언을, 그것도 주제나 맥락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상대 후보자 검증이라는 미명으로 공론장에 던졌다. 윤석열이 민주공화정에 계엄이라는 폭탄을 투척했다면 그는 우리 공론장에 수치심 상실과 당당한 혐오라는 독약을 뿌렸다. 인터넷에서 울려 퍼졌던 격언 “괴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Do not feed the trolls!)”가 이제는 후보자 공통의 대선 구호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를 검증하고 유권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기회로서 다자간 TV 토론 자체가 무용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다양한 형태로 더 많이 제공되는 게 좋다. 하지만 지금처럼 거죽만 유지하는 알리바이성 선거 이벤트라면, 나아가 공론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발언이 당당하게 전 국민에게 도달되게 방치하고 그로써 여타 후보자조차 그 똥물을 뒤집어써야 하는 토론회라면 차라리 폐지하는 게 마땅하다. 단지 현행법이 규정하고 있는 기준을 넘겼다고 해서, ‘민주적 한계’를 벗어난 주체의 목소리가 토론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 국민에게 전파되도록 조장하는 일은 반헌법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 싸움에 참전해서 마치 개인 SNS 포스팅하듯, 해당 부분만 교묘하게 도려낸 쇼츠를 퍼뜨리겠다는 의도로 토론에 임하는 인물이 최소한 25%의 기회를 보장받는 것을 선거 토론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한쪽에선 ‘제도화된 전광훈’이, 다른 한쪽에선 이른바 ‘제도화된 일베’가 토론과 선거를 반민주적이고 혐오적인 선동의 장으로 만든 셈이다. 게다가 제도화된 만큼 순치 혹은 완화된 것조차도 아니다. 오히려 제도를 자신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우리 모두에 대한 모독이다.
이는 결국, 그 안에서 등장하는 목소리와 인물이라면 공론으로 인정되고 공인으로서 존중받도록 해줄 ‘공적 공간(public sphere)’의 가치를 허무는 일이고, 심지어 그렇게 물렁해진 가치를 뭉텅뭉텅 썰어서 새로운 괴물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할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일이나 진배없다.
기본적으로 그들과 그들을 앞세운 세력의 잘못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한계이자 정치 문화의 실패이며, 무엇보다 미디어가 조장한 일이다.
우리 제도는 헌정 질서를 벗어난 정치세력이라 할지라도 당장 공화정 바깥으로 축출하지 못한다. 그저 그 우두머리를 어렵사리 파면할 수 있을 뿐이며, 개중 일부를 내란범으로 단죄한다고 한들 그들의 정치적 발언까지 금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 근거와 논리가 아닌 궤변과 혐오 발언을 펼친다고 해서 그들의 발언권을 빼앗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버르장머리 없다’거나 ‘인간이 돼먹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한들 애초에 공론의 격을 떨어뜨려 이득을 얻기로 작정한 트롤러에게는 그런 힐난조차 맛난 먹이가 될 따름이다.
미디어가 일조한 반공화주의적 정치
비록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건 정치 문화다. 선거를 통해 그들을 정치적 금치산자로 만들겠다는 광범위한 시민의 의지와, 정말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그들의 공포가 서로 만났을 때, 제도의 불가피한 허점이 메워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 문화의 한 축에는 벌거벗은 생존 의지와 세상을 한없이 가볍게만 여기는 나른한 태도, 즉 사이코패스적 악의(惡意)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 뒤엉켜 있다. 원시적 적개심을 머리에 이고 도구적 이성을 몸통으로 삼은 흉측한 뱀이 똬리를 틀고 앉은 격이다.
이런 정치 문화는 미디어에 의해 조장되었다. 다시 뭉칠 정당한 가치라도 찾아가는 가시밭길로 이끌기보다, 설혹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라 해도 그것이 뭉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능히 꽃길이 되리라 생각하게 했다. 또 논란이 곧 뉴스 가치임을 부단히 훈련시킨 결과 불만의 온당함보다 불만의 강도가 사회적 목소리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는 핵심 요인임을 확신하게 했다.
그들이 아무리 정치적 주류의 일각을 구성하고 있다 해도 헌정 질서를 벗어난 목소리를 미디어가 단호히 배격했더라면, 떼로 몰려다니며 조롱과 혐오의 돌팔매질을 하는 집단에게 청년과 미래세대라는 그럴싸한 이름표를 미디어가 붙여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반(反)공화주의적 정치 문화가 이렇게나 고약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나는 미디어가 그걸 무기력하게 방치하거나 의도치 않게 조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미 그런 정치 문화의 일부이자 적극적 조성자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한 일부 언론인들로서는 “정책이 실종됐다”는 둥 “또다시 네거티브가 판친다”는 둥 다분히 관습적으로 ‘개탄’하는 게 고작이다. 왜 정책이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지, 지금의 네거티브는 과거의 네거티브와 또 어떻게 다른지 진지하게 논구하여 근본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은 몇몇을 제외하고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오히려 이들 다수가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으며, 그로부터 이익을 빼먹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12월3일 그날 이후 반년 가까이 이들을 지켜본 결과, 과거로부터 온 극단적인 세력과 새로운 극단이 될 세력을 배제하는 공화적 공간을 창출하는 일에 별반 관심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들은 계엄이 실제로 성공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사유하지 않는다. 대통령 파면 선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발생했을지도 모를 대혼란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싸움 붙이기에 적당한 ‘꾼’들만 찾아 그로부터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도모하는 흥행사(promoter) 역할에만 관심이 있다. 아마도 계엄이 성공했던들, 혹은 윤석열이 복귀했던들, 그로 인해 빚어질 비극 역시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생존에 도움이 될 대상으로 삼았을 테다.

그런 미디어에게 이 세상은 이미 하나의 가상현실이거나 게임이다. 마치 대통령 후보로서 참여한 TV 토론을 일종의 ‘레이드(raid: 급습이라는 의미의 게임 미션)’, 즉 자신의 인생 게임에서 그간 쌓아놓은 ‘스탯(statistics: 능력을 수치화한 것)’을 넘어 크게 ‘렙업(level up: 등급 상향)’할 요량으로 새로운 ‘템(item: 무기나 도구 등)’을 얻어서 (혹은 얻기 위해) 한 판 뛰고 올 승부처 정도로 여기는 누군가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물리 현실에 직면해선 거꾸로 과몰입하는 경향도 있다. 일순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미움받고 버림받은 존재,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겨버린 존재가 된 것처럼 군다. 이들의 세계관 속에는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든 거대한 악이 늘 있는데, 그건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빨갱이이거나, 속칭 ‘꿀 빤 세대’이거나, 여성이거나, 어린이 혹은 노인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중국인 간첩이거나, 정파적이고 편협한 시선에서 언론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대개는 정작 약자인 이들을 ‘보스몹(boss monster: 공략해야 할 최종 괴물)’의 지위로까지 올리는 데에는 그다지 많은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들에게 증거는 의지만 있으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논리란 그걸 엮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니까. 그리하여 그들은 미디어와 손을 잡고,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 이들을 ‘파훼’할 ‘대안 현실’을 만들어 그 새로운 게임판의 이슈와 등장인물을 조작한다. 마치 TV 토론에 나선 누구들처럼 말이다. 알고 보면 참으로 그들은 서로 닮았다.
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