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웰다잉’ 마지막을 존엄하게 (2)“나다운 마지막 모습도 내 권리”…‘생전 장례식’ 치른 연극배우 박정자씨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라” 부고장 보내
150여명 지인과 슬픔을 ‘잔치’로 바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장례식을 먼저 치른 연극배우 박정자씨(83)가 환한 미소로 말했다. 5월25일 강원 강릉 순포해변에서 열린 그의 ‘생전 장례식’은 조심스럽고 엄숙한 죽음의 얼굴을 흥겨운 ‘잔치’로 바꿔 놓았다. 슬픔이 아닌 축제로, 끝이 아닌 삶의 연장선으로. 이별의 풍경을 새로 그려낸 박씨를 5월27일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예술원에서 직접 만나 그날의 이야기와 ‘웰다잉, 죽음을 준비하는 삶’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장례식 날, 박씨는 수의 대신 연둣빛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고 ‘고인’의 자리에 섰다. 친구가 만든 미니어처 상여를 들고 어깨춤을 추며 해변을 걸었고, 150명이 넘는 하객들이 그 뒤를 따랐다. 초대장 대신 부고를 받은 지인들은 작품 제목이 적힌 만장 (輓章)을 흔들며 박씨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래된 이야기와 함께 우리가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라”는 그의 바람대로, 이틀간 이어진 장례식은 박씨의 인생을 기억하고 축하하는 이들의 웃음과 온기로 가득했다. 그는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해 준 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어 행복했다”며 “헤어지는 장면도 축제처럼 하고 싶었는데, 웃으면서 보내주고 떠날 수 있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이번 강릉 바닷가에선 ‘해방감’이라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관 속이 너무 따뜻하고 평화로웠어요. 고해 같던 인생을 내려놓는 순간, 이렇게 편안해질 수 있다는 걸 느꼈죠.” 장례를 치른 이후 그는 지금의 시간을 ‘보너스 삶’이라 부른다. “욕심도, 미움도, 두려움도 벗어났어요. 이제부터는 조금 더 단단하고 가벼운 삶이에요.”
그는 시어머니에게서 배운 지혜대로, 훗날 가족이 함께 머물 수 있도록 안장 계획을 세워뒀다. 자신과 남편의 수의를 미리 준비하고 보관 장소도 가족에게 일러뒀다. 또 현재 투병 중인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윤석화씨의 수의도 미리 챙겨뒀다고 넌지시 전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자세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역시 작성해 뒀다. “기계에 의존하는 삶은 의미 없잖아요. 산소호흡기? 절대 사절이에요. 난 충분히 살았어요. 죽는 사람에게도 권리가 있잖아요. 누구나 존엄하게, 아름답게, 명예롭게 죽을 권리 말이에요.”
박씨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모습이 “결코 특별한 건 아니다”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과 영감을 남겼다. 그가 치른 생전 장례식은 마지막까지 자기 삶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고, 그동안 함께해 온 이들과의 관계를 보듬는 겸허한 의례였다. 동시에 남은 시간을 온전히 자기답게 살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무대이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래전부터 내 삶을 스스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해 왔어요. 누구나 끝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오잖아요. 그러니 부디 남은 시간만큼은 더 충만하길 바라고, 마지막 모습도 나답길 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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