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은 무자비한 정복자? 다문화 교류·융합의 촉진자! [.txt]
정치사 아닌 지리학·음식·의학 등 문명교류 주목
새로운 기술·사상 유통된 ‘팍스 몽골리카’ 재조명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라틴어로 `몽골에 의한 평화'라는 뜻이다.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 초반까지 몽골 제국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동안 역내 여러 민족은 비교적 안정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제국에 의한 평화는 로마 제정이 성립한 기원후 27년부터 200년 가까이 지속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였다. 팍스 몽골리카는 팍스 로마나 이후 천년이 지나 등장한 제국의 평화 시대였다.
정복 국가의 지배에는 피지배 집단의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제국의 평화는 강력한 군사력과 강압 통치 같은 ‘하드 파워’뿐 아니라, 효율적인 교통·통신, 역내 상업과 교역의 발달, 문화적 교류와 융합 등 ‘소프트 파워’가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미국의 유라시아사 전문가 토머스 올슨의 2001년 저작 ‘몽골의 유라시아 정복과 문화’는 몽골 제국을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다문화적 융합과 지식 교류를 촉진한 제국으로 재조명했다. 그전까지 학계의 몽골사 연구는 권력의 승계와 분열, 무자비한 정복 전쟁 같은 정치사 서술이 대부분이었다.

올슨은 약탈·파괴·살상으로 점철된 기존 인식을 뒤집고 몽골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한문·페르시아어·아랍어·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권의 사료를 활용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문화 교류의 실상에 초점을 맞췄다. 올슨 이후 몽골사 연구는 방향이 바뀌고 훨씬 풍요로워졌다. 옮긴이 조원 교수(부산대 사학과)도 중국 중앙민족대학교와 베이징대에서 원나라와 유라시아사를 전공한 몽골 전문가다.
올슨은 몽골 제국이 다양한 종교를 관용하고, 상업과 무역을 보호·장려하고, 무슬림과 중국인 등 정복지 현지인들을 제국의 관료로 적극 활용한 통치술에 주목했다. 그가 애초 구상했던 것은 중국 원나라와 이란의 일 칸국 사이의 정치·외교 관계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칸국들이 서로 충돌을 피하고 외부의 도전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교류가 “특별한 전문가들, 학술적 저서들, 물질문화, 기술의 광범위한 교섭을 통해 점차 광범위하고 다양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연구와 집필 방향이 바뀌었다. 지은이는 문화 교류의 구체적 사례들로 사서 편찬, 지리학과 지도학, 농업, 요리, 의학, 천문학, 인쇄술 등 크게 7가지 분야를 꼽고 상세한 설명을 붙였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1206년 몽골 초원에서 나고 자란 야심 찬 청년 테무친이 주변 부족들을 제압하고 위대한 나라의 건국을 선포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 대몽골국이었다. 테무친은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왕위에 올랐다. 몽골 제국의 초대 황제 '칭기즈 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유목민의 통치 방식에 따라 제국 내부에는 여러 ‘울루스’들이 탄생했다. ‘울루스’는 몽골어로 토지·백성·국가를 뜻한다.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이 칭기즈칸의 아들·손자들의 권력 다툼과 지역 자치화로 분열하면서, 일부 울루스가 독자적 칸(군주)을 내세우며 정주화·국가화한 것이 ‘칸국’이다.
원나라는 후계 칸국들 가운데 칭기즈칸(1162~1227)의 손자 쿠빌라이가 중국 본토의 대도(베이징)를 수도로 삼고 몽골고원을 기반으로 세운 ‘카안 울루스’(몽골제국 황제의 직할지)였다. 몽골어로 ‘칸(Khan)’은 부족장·군주를 가리킨다. 카안(Qaan, 대칸)은 ‘칸 중의 칸’으로, 몽골 제국의 최고 황제다. 초대 카안 칭기즈칸에 이어, 그의 3남 오고타이 칸(제2대), 오고타이의 아들 구육 칸(제3대), 칭기즈칸의 4남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 칸(제4대)과 쿠빌라이 칸(제5대)이 몽골 제국의 황제 ‘카안’이었다. 일 칸국은 몽케(장남), 쿠빌라이(3남)와 형제였던 훌레구가 페르시아 지역에 세운 칸국이었다.

중국 본토와 일 칸국은 경제적으로 깊은 연관 관계였다. 마르코 폴로는 페르시아의 호르무즈항이 중국과 인도에서 온 상품들의 주요 집적지라고 기록했다. 14세기 아랍의 저명한 학자이자 여행기 저자인 이븐 바투타도 페르시아만 해역을 항해하던 중국 선박들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동아시아에서 페르시아로 전해진 상품들에는 향신료·구리·자단목·보석류·직물 등이 포함돼 있었다. 중국과 이란 사이에는 민간 무역과 별개로 왕실 간 공식 교류도 있었다. 사료에서는 이를 ‘공물’로 표현하는데, 몽골의 사회적 통념과 관습에 비춰볼 때 상호주의적 선물 교환이라는 게 지은이의 해석이다.
문화 교류도 활발했는데, 사서 편찬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증거다. 페르시아 출신의 대학자 라시드 앗 딘이 당시에 알려진 세계의 역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자미 알타와리크’가 대표적이다. 한자어로 ‘집사(集史)’다. 1308년께 완성된 ‘집사’에는 성서 속 예언자들,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출현, 칼리프와 주요 술탄, 몽골과 튀르크 족의 역사, 칭기즈칸 가문의 흥기, 중국인·인도인·유대인·프랑크인에 관한 개별적 서술, 광범위한 계보의 부록과 지리적 개요 등이 담겼다. 앗딘은 동쪽 끝 한반도와 일본까지 아우른 인문지리서 ‘제역도지’도 펴냈는데 소실돼 전하지는 않는다. 그 책에는 몽골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교통·통신 및 행정 연락망 시스템인 ‘역참’도 상세히 기록됐다고 한다.

음식과 요리의 교류도 이질적 문화권을 아우른 대제국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유목민족 몽골은 식재료가 다양하지 않고 고기와 유제품이 주식이었다. 몽골은 동물의 피도 중요한 식단으로 여겼기에 도살할 때 가슴을 절개하고 피를 사체에 보관했다. 이는 서아시아의 무슬림 음식과 유대인의 코셔가 동물의 목을 베어 도살하고 피는 모두 버리는 전통과 충돌했다. 몽골은 처음엔 초원의 거친 음식 전통을 고집했지만, 점차 취향과 필요에 따라 다양한 음식을 차용하고 적응했다. 원 제국의 백과전서 ‘사림광기’에는 이슬람식 만둣국이 나온다. 몽골의 양고기 육수와 치즈, 중국의 쌀가루, 만주의 잣, 서아시아산 꿀과 호두, 이슬람 완두콩 등이 고루 쓰인, 제국의 퓨전 요리였다.

지은이는 책의 맨 뒤에 자신의 연구 성과와 결론을 ‘요약’으로 정리했다. 그걸 더 축약하면 이렇다. 몽골제국의 통치는 정주민 통제와 수취가 우선이었지만 부차적 효과로 문화 접촉과 교류의 수많은 기회를 만들었다. 칭기즈칸 가문은 인간의 재능과 기술을 땅·가축·재화처럼 일족이 나눠 가질 전리품으로 보았다. 몽골인의 후원 아래 사람과 동·식물, 새로운 상품과 기술과 사상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며 유통됐다. 몽골 제국은 한 세기가 넘도록 구세계의 문화 교류의 개시자이자 중개자, 나아가 주체로 기능했다. 14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이 붕괴한 뒤 100년이 지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팍스 몽골리카의 문명 교류는 유럽의 대항해 시대로 대체됐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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