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씨알의 힘, 엉덩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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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되고 싶었다 하늘은 제 앉을 자리 가장 낮은 데로 골랐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큰 공부, 부지런히 익혔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온몸이 귀가 되었다 황송했다
별빛을 듣고 빗방울을 듣고 땅강아지를 들었다
어미도 되었다가 새끼도 되었다가 배고픈 그림자들 품었다
기다리다 끌어안고 기다리다 끌어안고, 온몸 엉덩이가 되었다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삶도 죽음도 한자리에서 둥그레졌다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이 천명
금 간 시멘트벽에 기대어 한해 내내 슬픔의 집을 키웠다
펑퍼짐한 신이 내려와 산다 씨앗이 된다
-시 ‘청둥호박의 까닭’, 김수우 시집 <뿌리주의자>
올해도 여러 종류의 호박이 자라고 있다. 큰 호박잎이 다른 작물을 덮어버리기 일쑤여서 욕심을 줄이려는데 맘대로 안 된다. 찌개에 넣거나 전 지져 먹기도 좋은 애호박은 기본이고, 둥글게 열매가 달리는 조선호박도 세 개 정도 심는데, 늦봄쯤엔 두엄더미에서 저절로 자라난 호박 모종들이 있다. 힘써 나왔는데 퇴비 속에 처박아 버리기엔 미안해서 좋은 자리 찾아 옮기다 보면 매년 호박이 늘어난다.
근대 역사와 문화가 새겨진 부산 원도심에 자리 잡은 ‘백년어서원’에서는 연간 수백회의 독서회와 글쓰기와 시 창작 수업 등이 이루어진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큰 공부, 부지런히 익”히는 곳이다. 책과 사람을 “황송”하게 받들면서 문학과 역사, 철학과 환경 등을 넘나들며 “읽고 쓰고 읽고” 출판해왔다. 그곳은 “온몸이 귀가 되”는 텃밭,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서로를 키워왔다.
청둥호박은 덩굴손과 호박잎 뒤 “가장 낮은 데” 시치미를 떼고 있어서, 서리가 내리고 호박잎이 시들어버린 후에야 엉덩이가 살짝 짓무른 펑퍼짐한 엉덩짝을 발견하곤 한다. 애호박일 때 몇개 따먹다 잊어버리곤 하는 조선호박은 여름을 지내면 굵은 골이 생기면서 둥글고 노랗게 익어간다. 계절이 바뀌면서 20여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백년어서원’도 “배고픈 그림자들 품”으며, 늙은 호박이 되어갔겠다. 땡볕과 폭우와 폭풍 사이에서 “별빛을 듣고 빗방울을 듣고 땅강아지를 들”으며, 서로를 받아 적었을 게다.
“땅이 되고 싶”어서, “제 앉을 자리 가장 낮은 데로” 골라 앉은 하늘 같은 사람이 이 땅에는 참 많다. 서로 다르게 존재할 가능성과 관계 방식을 향해 진동해 온 ‘백년어서원’처럼. 100여개의 나무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환대와 공존과 공생의 공간을 만들고, 20년 가까이 지켜온 김수우 시인처럼. “온몸”이 “엉덩이가” 된 청둥호박 같은 사람들 덕에 세상은 나아간다. 무릎걸음처럼 앉은걸음처럼 더디지만 수많은 씨앗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지혜를 모아가는 엉덩이의 힘으로 민주주의는 자란다.
“한자리에서 둥그레”지며 애호박이 열리는 시절, 지긋한 엉덩이의 힘으로 견디는 민초들의 노래를 듣는다. 망가지고 베어지고 잘려 나가는 죽임과 절멸의 세상에서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이 천명”이 된 씨알들의 울부짖는 노래를. “기다리다 끌어안고 기다리다 끌어안”는 희망의 노래를. 민주주의는 서로를 경청하는 언어로 가득한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 타자(他者)를 배우고 실천하는 염원이 있는 곳에 “펑퍼짐한 신이 내려와 산다 씨앗이 된다”.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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