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번역 능력 높아지는데, 의학용어 우리말로 바꿔야 할까 [건강한겨레]

최지현 기자 2025. 6. 1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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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한림원 의학용어개발및표준화위원회, ‘제70회 의학용어 원탁토론회’ 개최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의학한림원 회의실에서 진행된 의학한림원 의학용어개발및표준화위원회 ‘제70회 의학용어 원탁토론회’ 모습.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인겸 의학한림원 부원장(경북대 의대 교수), 최지현 건강한겨레 기자, 강현화 연세대 교수, 신정원 분당서울대병원 교수(위원회 위원), 노혜린 인제대 의대 교수(위원회 위원장), 은희철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위원회 위원), 송영빈 이화여대 교수, 황건 국군수도병원 교수(전 대한의사협회 의학용어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제공

‘좌창’과 ‘갑상샘’. 이 두 단어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어진 의학계의 우리말 의학용어 정리 노력의 성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좌창은 과거 여드름을 일컫던 용어지만, 이제는 여드름이란 용어가 자리 잡으면서 거의 잊혔다. 반면, 갑상샘은 ‘갑상선’을 우리말의 뜻에 맞게 풀어 순화했으나, 20여 년 동안 여전히 두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제70회 의학용어 원탁토론회를 개최한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의학용어개발및표준화위원회는 이러한 우리말 의학용어 개발 역사를 돌아보고 우리 사회와 기술, 전문지식이 빠르게 바뀌는 현실에 맞춰 향후 추진 방향을 점검했다.

이날 은희철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피부과)는 30여 년간의 관련 활동을 바탕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말 의학용어가 전개돼온 흐름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우리말 의학용어에 대한 정비와 표준화 노력이 1945년 광복 이후 시작된 뒤 1977년 의료보험제도 출범과 함께 본격화했다고 평가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의학한림원 회의실에서 진행된 의학한림원 의학용어개발및표준화위원회 ‘제70회 의학용어 원탁토론회\'에서 노혜린 위원장(인제대 의대 교수)이 발언하고 있다. 최지현 기자

광복 이전 현대 의학이 도입되던 시기엔 한자와 일본어, 서양어 등에서 유래한 전문용어를 번역하는 일에 집중했다. 광복 후엔 안과학회가 우리 언어 체계와 맞는 우리말 의학용어를 조직적으로 구축하려 처음 시도해 1949년 당시 눈알, 눈동자 등의 새 용어를 담은 시안을 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출판이 무산됐고, 이후 의학계는 기존의 일본어 및 한자 중심의 의학용어와 미국 유학파들이 교육한 영어 전문용어를 거의 그대로 사용해왔다.

이후 1970년대에야 정부와 학계는 의학용어를 조직적으로 수집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정부가 주도해 1976년 출간한 ‘과학기술용어집 제1집’, 1977년 의료보험제도 출범에 맞춰 대한의사협회의 전신인 대한의학협회가 의학용어 제정 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 만에 급히 3만5천여 개의 한자 용어를 수집해 출간한 ‘의학용어집 1판’, 1975년부터 6명의 해부학 교수가 일본어에서 차용해 사용해온 해부학용어를 수집해 1978년 출간한 ‘해부학용어집 1판’ 등이 계기다.

이후 고 전종휘, 정인혁, 지제근 교수 등의 주도로 추가적인 의학용어 수집과 표준화 작업이 이어지다 1992년 ‘의학용어집 3판’에서 일부 힘든 한자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고 통일하는 노력이 시작됐다. 또 1996년 ‘남북한 의학용어’ 발간 경험이 더해지며 2001년 ‘의학용어집 4판’에서 의학용어를 순우리말로 교체하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이때 갑상샘, 뼈엉성증(골다공증) 같은 새 전문 어휘가 도입된다. 이때 제정된 순우리말 의학용어 도입을 놓고 의학계에선 찬반양론이 일어났고 교육과 임상 현장에서 오랫동안 혼용됐다. 2020년 출간한 ‘의학용어집 6판’에서야 파급 효과가 큰 162개의 기본 권장용어를 확정하며 이러한 혼란을 일부 정리했다.

은 교수는 “20년 이상 한자어와 고유어 선호 문제를 놓고 지속된 소모성 논쟁은 의학용어집 6판의 발간으로 이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기에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자어와 씨름하는 사이 영어라는 다른 거인이 나타났고, 의학용어집 편찬 사업의 실무와 지원에 대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의학회, 의학한림원 사이의 역할 정리도 필요한 상황”이라며 “이제 다시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이 도약해 앞으로도 우리말 의학용어를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영어 전문용어를 음차하려는 경향이 강해진 현재의 학계 분위기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방향성 정립과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에 따라 크게 변화한 전문용어 관리 방식을 어떻게 개선할지 등을 논의했다.

용어학 전문가인 송영빈 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교수는 “AI의 번역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자국어로 전문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대한 변화 속에 놓여 있다”며 “이에 의학용어 우리말화가 필요하냐는 의문도 생긴다”고 말했다. 송 교수는 이어 “하지만 의학 등 전문 분야가 AI와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은 비전문가를 배려하는 공감 능력”이라며 우리말화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한국사전학회장과 국제응용언어학회장을 맡은 강현화 연세대 국어국문학 교수는 “용어는 사용자의 것이지만, 그간 ‘사용자 중심적인 접근’이 부족했다”며 “향후 비전문가 집단과도 원활히 지식을 소통하기 위해 의학용어를 수집하고 정리하던 기존 방식을 넘어 용어의 간단한 정의와 기능적 용법을 함께 제시하는 사전 형식의 의학용어집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노혜린 위원장(인제대 의대 의학교육학 교수)은 “향후 위원회가 용어 관리 시스템 등에서 AI 활용을 확대하고 직종 간 의학용어 표준화와 활용 활성화를 위한 보급 교육 확대 등 실용적 기조를 강화하겠다”고 말했으며, 김인겸 의학한림원 부원장(경북대 의대 약리학 교수) 역시 “의학한림원이 표준 의학용어와 법조계 및 의료보험계, 언론계의 용어를 조정하는 작업을 맡겠다”고 화답했다.

최지현 기자 jhcho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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