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오스트리아 남부를 가다 ② 그라츠
![그라츠 산성(Schlossberg)에 있는 시계탑(Uhrturm)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3401lnkp.jpg)
(그라츠·클라겐푸르트[오스트리아]=연합뉴스) 권혁창 기자 = 그라츠로 가는 날, 하늘이 활짝 갰다. 짙푸른 5월의 빛으로 도시는 다시 태어난다.
밝음과 어두움의 경계가 모든 사물을 깨우고 여행자의 심장은 부푼다.
그라츠에 입성했다. 그라츠는 이름부터가 슬라브어 'Gradec'(작은 성)에서 유래했다.
슈타이어마르크주의 주도이자 인구가 30만명에 가까운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지만, 대도시라는 느낌은 없다.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왕실의 귀족들이 오래 거주했고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만큼 잘 보존돼 있다.
전체적으로 중세풍 거리 군데군데 유니크한 현대식 건축물이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융화된 것이 인상적이다.
![그라츠 산성에서 바라본 구시가지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3701zjre.jpg)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쿤스트하우스
첫 목적지는 현대미술관인 쿤스트하우스 그라츠(Kunsthaus Graz)다.
영국의 피터 쿡과 콜린 푸르니에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얼핏 중세 도시 한복판에 착륙한 검은 외계 생명체 같다.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2003년 그라츠가 유럽 문화수도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
처음엔 80%의 시민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라츠만의 독창성을 뽐내는 자랑거리다.
미디어 아트 전시 'Freeing the Voices'가 열리고 있었다.
다양한 소리를 통해 근대성의 위기를 진단하고 인간의 목소리를 해방한다는 취지의 기획전시다.
어디선가 제주 방언이 들려왔다. 해녀들이 부르는 노동요 소리가 영상과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라츠 쿤스트하우스 외관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3973eyci.jpg)
쿤스트하우스 바로 앞에는 무어강이 흐른다. 폭은 좁고 물살은 사납다.
무어강이 흘러 드라바강으로 들어가고 드라바강이 다뉴브강과 합류하니, 무어강의 물줄기는 결국 다뉴브강의 종착지인 흑해까지 흘러간다.
구시가 중심으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데 상류 쪽에 또 하나의 괴건축물이 물 위에 떠 있다. 인공섬인 무어섬(Murinsel)이다.
양쪽으로 다리가 이어져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구조다. 마치 강 중간에서 악수하는 모양새인데, 강을 기준으로 그라츠의 상류층 거주지와 서민층 거주지가 나뉘어 있었던 과거를 상징하며 계층 간 화해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서울 한강을 떠올리게 했다.
![그라츠의 인공섬인 무어섬(Murinsel)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4166qzwk.jpg)
걸어 올라가 미끄러져 내려오는 곳
뭐니 뭐니 해도 그라츠의 랜드마크이자 제1의 관광 포인트는 그라츠 산성(Schlossberg)과 시계탑(Uhrturm)이다.
도시 한복판에 해발 473m 높이로 솟아있는 산성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곳으로, 12세기에 슬라브인들에 의해 요새화됐고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손상됐으나 재건돼 현재는 그라츠 도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징적인 명소가 됐다.
성에 올라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걸어서, 레일열차로, 엘리베이터로. 내려오는 것은 네 가지다. 올라가는 방법 세 가지에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주장하는' 미끄럼틀이 추가된다.
![그라츠 산성 위에서 한 남성이 스위스 악기인 '핸드팬'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4409owob.jpg)
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인 시계탑은 1561년에 세워졌다.
특이하게도 시침이 더 길다. 산 아래에서도 시간을 정확히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산성에 오르면 그라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감탄사와 인생사진이 빠지지 않는다.
언덕 벤치에서 한 남자가 UFO처럼 생긴 둥근 타악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맨손으로 연주하는데 소리가 맑고 은은하다. 스위스에서 2000년에 만들어진 '핸드팬'이라는 악기라고 한다.
건축물(쿤스트하우스)과 악기(핸드팬)가 한 도시에서 공명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그라츠 시청사와 중앙광장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4635typk.jpg)
구시가지엔 여행자 취향에 따라 흥미를 자극하는 장소가 많다.
아치형 테라스에 르네상스·고딕·바로크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시민회관(Landhaus), 그라츠의 모든 트램 노선이 정차하는 하우프트프라츠(Hauptplatz), 유럽에서 가장 큰 컬렉션을 보유한 무기박물관(Landeszeughaus), 15세기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그라츠 대성당(Graz Dom), 빈 국립오페라극장 다음으로 규모가 큰 오페라하우스(Oper Graz), '도시의 왕관'이라 불리는 페르디난트 2세 영묘(Mausoleum), 두 계단이 갈라졌다 재회하는 이중나선계단(Doppelwendeltreppe)도 구시가에 모여 있다.
![아치형 테라스가 아름다운 그라츠 란트하우스(Landhaus)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4814axbm.jpg)
그라츠는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기후로 인한 풍부한 농산물, 이웃 문화권과의 빈번한 교류를 가능케 한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일찍부터 미식 문화가 발달했다.
호박씨 오일을 재료로 한 요리들이 많고, 백헨들(Backhendl)이라고 불리는 닭고기 튀김, 냄비에 소고기를 삶아내 한국의 갈비탕 같은 맛을 내는 타펠슈피츠(Tafelspitz), 얇게 펴서 구운 페이스트리 안에 사과 소를 넣은 디저트 '사과 슈트루델'(Apfelstrudel) 등도 유명하다. 식당을 찾아 끼니를 해결하는 재미가 있다.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디저트는 1569년에 오픈한 유서 깊은 빵집 '호프베커라이 에데거-탁스'(Hofbäckerei Edegger-Tax)에서 케이크를 먹겠다는 계획이 일요일 휴무로 무산된 데 따른 실망감은 호박씨오일 아이스크림으로 달래야 했다.
![그라츠에서 맛본 아이스크림. 아랫부분의 연두색은 케른텐주 특산품인 호박씨오일로 만들었다.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5120dyec.jpg)
공작은 왜 날개를 펴는가
그라츠 여행의 끝은 트램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에겐베르크 성(Schloss Eggenberg)이다.
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원색의 하늘은 흰 구름이 한 점도 없어 외로울 지경이다.
15세기 말 중세 요새였던 에겐베르크 성은 17세기 요한 울리히 폰 에겐베르크가 개조해 현재의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했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런데 이 성은 귀족이 거주했던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천문학과 점성술의 영향으로 우주의 조화를 구현한 특이한 건축물이다.
성에는 365개(1년의 날 수)의 창문, 층별로 24개의 방(하루의 시간), 52개(한 해의 주 수)의 문이 있다. 2층에 실제로 가동할 수 있는 방의 수는 31개인데 이는 한 달의 날 수다.
![에겐베르크 성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5371zqlf.jpg)
프랑스식·영국식·이탈리아식 등으로 꾸며진 정원에는 플라타너스, 쥐엄나무, 백합나무, 황벽나무, 꽃물푸레나무, 회화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서양주목 등 다양한 꽃나무들과 그 사이로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공작들을 만날 수 있다.
공작은 때맞춰 그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펴 이국의 손님들을 환대한다. 사랑을 부르는 공작의 날갯짓을 목격한 건 난생처음이다.
공작의 날개를 보며 또 다른 날개를 생각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로 유명한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1926∼1973).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나 그라츠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에겐베르크 성 정원에서 날개를 활짝 편 공작 [사진/권혁창 기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12/yonhap/20250612080025668nbcn.jpg)
오래전 전혜린 씨의 에세이를 통해 바흐만을 접했던 기억이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바흐만의 싯구(번역본에는 시집 제목으로 쓰였다)는 이문열의 장편소설(1988) 제목이 됐고, 장길수 감독은 같은 이름의 영화(1990)도 만들었다. 영화는 그라츠에서 찍었다.
이 싯구는 다의적이다. 우리에게 '추락'은 무엇이고, '날개'는 무엇일까. 클라겐푸르트와 그라츠 여행 내내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6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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