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련 “성폭력 망자와 5년 싸움… 그는 죽음으로 도망치지 못했다"
피해자 변호한 김재련의 소회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권력형 성폭력을 인정한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했다는 판결이 지난 5일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박 전 시장이 부하 직원에게 ‘향기가 좋다’ ‘집에 갈까, 혼자 있냐’는 등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자신을 찍은 사진을 전송하고, 네일 아트를 한 피해 직원의 손과 손톱을 만지는 등 성희롱 범죄가 재판을 통해 인정된 것이다. 2020년 7월 박 전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지 5년이 다 되어서야 진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피해자 김잔디(가명)씨는 아직도 일상을 온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다. 김씨를 대리한 김재련(53)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는 “박 전 시장이 성폭력을 저지르고 죽음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11일 서초동에서 김 변호사를 만났다.
−이번 판결의 의미는.
“이번 소송은 유족이 억울하다며 제기했는데, 역설적으로 박 전 시장의 성폭력이 사실로 확인되는 결과가 됐다. 비록 가해자를 사법 심판대에 세우진 못했지만, ‘가해자의 행위’를 법의 심판대에 세워 판단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해자의 사망, 인권위 결정, 대법원 확정까지 5년이 걸렸다.
“후련하기도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인권위가 성폭력이라고 결정한 이후에도 피해자는 박 전 시장 측 지지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 유족이 제기한 이 사건 외에도 박 전 시장을 다룬 다큐멘터리 상영 금지 가처분 사건, 유족 측 정철승 변호사가 피해자의 신원을 누설하고 비방한 사건도 있었다. 이뿐 아니라 유튜브나 소셜미디어에서 ‘가짜 미투’라는 허위 사실을 올리고, 이런 게시물 캡처본이 돌아다니는 식의 명예훼손이 이어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정도다.”
−변호사에 대한 공격은 없었나.
“다른 의뢰인과 함께 재판을 가고 있는데 다른 재판에 온 방청객 무리로부터 ‘저거 김재련 XXX 아니냐’는 욕설을 들었다. 지난달엔 아이가 아파 약국에 갔는데, 나를 알아본 약사가 박 전 시장과 가까운 사이라며 조제를 거부한 적도 있다. 약사법 위반으로 신고하겠다고 하니 그제야 마지못해 처방을 해줬는데, 김잔디씨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가족까지 불이익을 받는 상황에 맞닥뜨리니 처음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 사건은 2차 가해가 특히 심각했다.
“정치권과 사법부 모두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당시 김잔디씨를 ‘피해 호소인’으로 불러야 한다 했다. 그 단어가 이 사건을 진영 논리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는 비극적인 상징이었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하자 민주당에서 거리마다 ‘님의 뜻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도 걸지 않았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2차 가해에 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분도 문제였다. 소송하면 뭐 하나. 벌금형은 국가에 돈이라도 내지, 집행유예가 나오면 가해자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 성범죄 피해자는 고소하면 수사기관에서 진술하고, 증거에 부동의하면 법정에도 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라도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하게 되면 갖은 모욕도 견뎌야 한다. 법원이 짧게라도 실형 선고를 내렸다면 사람들이 쉽사리 2차 가해에 가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 진실이 덮이는 경우가 많다.
“엄청난 반칙이다. 일반 시민들은 지키고 싶은 명예가 없어서 재판받고 처벌을 감수하겠나. 법치국가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법의 심판을 받고, 피소된 사람들은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게 우리의 사법 제도 아닌가. 극단적 선택으로 사법 절차가 멈추면 피해자는 상대방의 죽음에 대한 자책까지 느껴야 한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 뒤, 경찰에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더라도 실체적 판단은 규명해달라고 했었다. 가해자들이 죽음으로 도망치는 걸 막아달라는 호소였다. 그러나 공권력은 그러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이 다른 사건보다 어려운 점은.
“성폭력 사건은 성적 의사결정권을 침해하는 문제여서, 수사기관으로선 침해 여부를 당장 알 수 없다. 대부분 사건 발생 직후 문제를 제기하는 게 아니다 보니 증거도 거의 없다. 결국 피해자가 피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기억의 문도 열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증거로 인정될 수 있도록 객관적 증거를 찾아야 한다. 아무리 진술이 일관돼도 정황 증거가 없으면 죄를 물을 수 없다. 형사재판의 대원칙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고,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잔디씨가 하루빨리 일상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민주당 정치인들이 나서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줘야 한다. 그들이 나서서 지지자들을 향해 2차 가해를 멈추도록 촉구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 예컨대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가 피해자의 실명을 공개해 작년에 집행유예가 확정됐는데, 그의 동생이 현재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다. 이럴 때 김 후보자가 인권위의 결정과 법원 판결에 입장을 밝히면 어떨까.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2차 가해를) 멈추라고 하면 멈춰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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