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며 흘렸던 8년 전 눈물
말없이 곁에 있지만, 돌봐주지 않으면 금방 시드는 화분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한 모금의 따뜻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기를
2017년 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면서 나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인간에게 여러 이유로 잊히고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로봇들이 작은 화분을 소중히 돌보는 장면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화분은 늘 로봇들의 곁에 있는 유일한 생명이다. 하지만 화분은 말이 없다. 화분은 움직일 수 없다. 화분은 스스로 빛을 쬐거나 물을 마실 수 없다. 그런 화분에게 말을 걸어주고, 함께 여행을 떠나고, 빛과 물을 챙겨주는 올리버 클레어의 모습을 보며 마음속 맺혀 있던 무언가가 툭 터졌던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말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손에 하얀 티슈를 건네주었다. 옆자리 관객이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그 사람은 내 손에 티슈를 건넨 채, 아무 말 없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이 한창인 와중이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따뜻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무대 아래의 관객은 조용한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 티슈로 눈물을 닦았고, 그 순간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누군가의 다정함은 때로 울음을 멈추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울음을 더 깊게 만든다. 그 한 장의 티슈를 화분처럼 손에 쥔 채 생각했다. 이 공연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무대 위와 무대 아래에서 흐르는 이 따뜻한 온기가 극장 바깥에서도 펼쳐지면 좋겠다고.
초연을 본 후 8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꽤 많은 사람과 부딪치고, 때로 멀어졌으며, 아주 가끔 다시 가까워졌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종종 ‘어쩌면 해피엔딩’의 화분을 떠올렸다. 말없이 누군가의 곁에 있지만, 돌보지 않으면 금세 시들어버리는 존재. 어쩌면 사람의 마음도 하나의 작은 화분일지 모른다. 말을 걸지 않으면 그 마음의 온도를 알 수 없고, 빛과 물을 건네지 않으면 그 마음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날의 티슈 한 장은 내게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타인의 눈물을 조용히 눈치채는 방법과 그 눈물에 말없이 손을 내미는 방법을.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의 알 수 없는 마음 앞에서 멈칫할 때마다 나는 그날의 객석을 다시 떠올린다. 아무리 깊은 어둠 속에 있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이 빛처럼 전해져 왔던 그 순간을. 그 생각을 하면 작은 용기가 생겨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속에 밝은 한마디의 말을 건넬 수 있는 용기를.
우리는 모두 화분 하나씩을 가슴에 품고 산다. 때로는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며, 때로는 누군가의 손길을 무심코 흘려보내며, 계속 그 자리에 피어 있는, 속마음이라는 화분을. 그 화분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못한 화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시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사랑하는 이들의 화분을 향하여 말을 건네고, 빛과 물을 건네며, 서로의 마음에 꽃이 필 수 있도록 소망하는 것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끝나고 관객들이 하나둘 극장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나는 한동안 객석에 머물러 있었다. 배우들이 퇴장하고, 조명이 꺼지고, 음악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그날의 공연도, 그날의 마음도 모두 ‘확실한 해피엔딩’이었다.
나의 하루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준 그 이름 모를 옆자리의 관객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한 모금의 따뜻함을 물처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마음이 시들기 전에 먼저 알아채고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말로 들리지 않더라도, 그저 한 번 더 바라보려고 애쓰면서. 누군가의 어깨가 조금 더 기울어져 있지는 않은지,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져 있지는 않은지 조용히 살펴보면서. 언제든 누군가의 눈물에 티슈 한 장의 체온을 건넬 수 있고, 누군가의 갈증에 물 한 방울의 위로를 건넬 수 있어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하루를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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