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⑪ 여성 독립운동가 산실, 하동
경남에는 총 43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서훈을 받았다. 이 중 하동에는 6명으로, 군 단위 지역 중에는 가장 많다. 근우회와 같은 여성 독립운동 단체가 오랫동안 활동 기반을 지켜 온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하동군과 민간 연구소의 발굴 노력 덕분에 잊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가 매년 서훈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잊힌 이름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삼남매·노동자도 독립투쟁
日 비판하다 옥고 ‘조복애’
오빠·남동생과 항일운동
부산 조선방직회사 직공인
김계정·제영순·조복금
여성운동단체 ‘근우회’ 활동
조복금만 2018년 서훈 받아
◇3남매의 뜨거운 외침= 하동 옥종면 출신 조복애(1918~?) 선생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42년 숙명여자전문학교 재학 중 일본을 비판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에 대한 정보는 이뿐이라 서훈을 신청했음에도 아직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동 지역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편, 오빠, 남동생과 함께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의 오빠와 남동생도 독립운동가이다. 오빠 조정래 선생은 1931년 2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이후 도쿄(東京)에서 유학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펼쳤다.
국내로 돌아온 뒤에는 조선반제동맹·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 공장과 학교에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1932년 12월 중순 도쿄에서 열린 태평양연안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대회에서 일제를 비판하다 이듬해 오사카에서 체포됐다. 그는 징역 4년형을 받고 복역했으나, 건강 문제로 집행이 정지되어 1935년 5월 20일 석방되었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2008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동생 조옥래(1922~?) 선생도 1941년 일본으로 유학해 조선청년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3년 일본 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삼남매가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오빠와 남동생만 유공자로 인정받은 현실이다.
지역 최초 여성독립운동가
광주서 재학 중이던 홍순남
부동교 장터서 독립 시위
결사 조직 등 항일 이어와
옥고 이후의 삶 기록 없어
2017년 유공자 인정받아
◇공장 안 여성 노동자의 외침= 하동 출신 김계정(1914~?), 제영순(1911~1992), 조복금(1911~?) 선생은 1931년 부산 조선방직회사에서 직공으로 일한 노동자였다. 김계정은 17살, 제영순과 조복금은 20살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지역사에서 잊혀졌으나, 전수조사를 통해 행적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사회·문화 운동 단체인 근우회와 교원노조 등에서 활동하며, 부산·대구·전남·전북 등을 무대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김계정 선생은 4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오빠 김계영·김태영·김두영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1931년 김계정 선생은 부산·대구를 중심으로 오빠인 김계영 선생과 함께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했으며, 1932년 대구에서 ‘반제반전 격문사건’에 연루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계정 선생은 오빠와 함께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는 드물게 대규모 조직 활동을 이끌었다.
1938년 남해 출신 독립운동가 한인식 선생과 결혼해 부부가 함께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한인식 선생 또한 김계정 선생의 셋째 오빠 김두영 선생과 같은 동지로, 남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제영순 선생은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여성 독립운동 진영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근우회는 1927년 결성된 여성운동 단체로, 일제강점기 농민·노동자·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다양한 사회 개혁 활동을 벌인 조직이다. 제영순 선생은 근우회 내부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조직 운영 및 선전 활동을 주도했다. 1932년에는 같은 하동 출신 권대형·조복금·류인두 선생 등과 함께 ‘반제반전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제영순 선생은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5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제영순 선생의 남편 전석순 선생도 1936년 결혼 후 항일투쟁을 이어가다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조복금 선생은 1926년 1월 진주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한 후 하동에서 여성 청년단체 및 근우회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1928년 7월부터 1930년 6월까지 근우회 하동지회 서무재정부, 정치연구부 대의원,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회 여자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 이르러 중앙의 근우회가 소멸함에 따라 하동지역 근우회 활동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조복금 선생은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서 제영순 선생과 함께 1931년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노동자’ 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5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1932년 7월에는 대구에서 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해 기관지를 출판·배포하다가 체포되어 기소유예를 받았다. 또 1933년 ‘전북교원비사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동갑내기 제영순·조복금 선생은 3살 아래인 김계정 선생과 언니·동생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조선방직회사 직공으로 일하며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에서 함께 활동했다. 조복금 선생은 서대구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에도 해방 직전까지 동지들과 항일운동을 이어 갔다고 전해진다.

◇하동 최초 여성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 부동교 인근 장터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부는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동참을 독려했다.
시위대에는 하동 출신 홍순남(1902~?) 선생도 함께했다. 그는 수피아여학교 재학 중이었다. 수피아여학교는 3·1운동 이후에도 일제에 반대하는 모임이나 비밀 결사 조직, 신사 참배 거부와 자진 폐교가 이어진 학교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기숙사 지하실에서 밤새 몰래 태극기를 만들며 시위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3월 10일 교사 박애순은 독립선언서 50부를 학생 홍순남과 박영자 등에게 나눠 주어 장터로 모일 수 있도록 했다. 홍순남 선생은 태극기를 준비해 시위에 뛰어들었다. 홍순남 선생은 시위 직후 도주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8개월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수십 명이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홍순남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같은 해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광주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홍순남 선생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의 노력으로 2017년 하동 최초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참고문헌= 광복회 경남지부(2019) ‘소외된 역사, 경남여성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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