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저자, 금남 최부

노성태 2025. 6. 11. 20:0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성별
말하기 속도
번역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21>최부
-추쇄경차관에 임명되다
최부 영정(강진군 군동면 강덕사 소장)
조선의 마르코폴로로 불린 금남 최부(崔溥, 1454-1504),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무오·갑자사화에 연루돼 단천, 거제도로 유배 후 참수됐기 때문이다. 이후 최부는 잠시 잊힌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의 외손자 미암 유희춘이 선조 4년(1571)에 남긴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를 통해 부활한다. 참수형을 당한 지 67년 만이었다.

최부는 나주에서 진사였던 최택의 아들로 태어나 결혼 후 처가인 해남에서 산다. 그의 호 금남(錦南)은 나주의 옛 이름 금성의 ‘금’과 해남의 ‘남’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다. 외손자 미암 유희춘은 ‘금남선생사실기’에서 외할아버지 최부를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굳고 강직하며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성장해서는 경전을 공부하고 글을 지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라고 쓰고 있다. ‘특이한 자질’, ‘강직’, ‘정밀’이라는 단어는 최부가 어떤 분이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24세에 진사과에 합격했고, 29세에 알성시에 급제했다. 성균관 전적 시절 역사서인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했는데, 명백하고 정확한 서술로 당시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거쳐 성종 18년(1487) 종5품직인 홍문관 부교리가 된다.

홍문관은 조정의 경서나 사적(史籍) 관리 뿐만 아니라 국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업무를 담당한 청요직(淸要職)이다. 집현전의 후신으로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동년 9월, 최부는 제주도 추쇄경차관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경차관은 조선시대 지방에 파견돼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를 말하는데, 이중 제주도 추쇄경차관의 임무는 제주도로 도망간 노비나 범죄자들을 색출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488년(성종 19),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부친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최부는 급히 배를 띄웠지만, 최부가 탄 배는 추자도 근처에서 태풍을 만난다. 10여 일을 표류하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강남의 저장성(浙江省) 린하이현(臨海縣)에 도착한다.

살았다고 환호하는 순간 시련이 또 닥친다. 왜구로 몰린 것이다. 필담을 통해 유학에 조예 깊은 선비임을 입증받고서야, 중국 정부는 말과 수레를 제공한다. 중국 관리들의 호송을 받으며 항저우(杭州)에서 운하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이른다. 베이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부친의 상중(喪中)이라 상복을 벗고 배알 할 수 없다고 고집해 중국 관원들을 난처하게 만든다. 결국 황제 접견시에만 예복을 입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34살 최부의 기개는 황제 앞에서도 당당했다.

이후 랴오둥(遼東)반도를 거쳐 한양으로 돌아온다. 중국에 체류한 지 136일 만에 8천800여 리의 남북을 관통해 귀국하자, 성종은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중국 3대 기행문 ‘표해록’

이에 일기 형식을 빌려 8일 만에 바친 책이 ‘표해록’이다. ‘표해록’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 기행문으로 평가된다.

‘표해록’은 세 권으로 구성돼 있다. 1권은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돼 제주에 부임하게 된 경위부터 부친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 중국 저장성 린하이현에 도착해 2월4일 왜구의 혐의를 벗을 때까지의 기록이며, 2권은 저장성의 성도 항저우(杭州)를 출발, 3월25일 톈진(天津)을 지날 때까지의 기록이고, 3권은 베이징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랴오둥반도를 거쳐 의주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세계 3대 중국 기행문 중 하나인 ‘표해록’이 어떤 가치를 지닌 지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6년 3월 14일자에 기록된 참찬관 이세인의 다음 말, “표해록은 금릉(金陵, 난징)에서 황제의 도읍(베이징)에 이르기까지 산천과 풍토, 습속을 갖추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중국을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로써 알 수 있다”에 잘 나타나 있다.

‘표해록’은 조선인이 중국을 가보지 않고도 중국의 산천과 풍토, 습속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금남 최부가 ‘조선의 마르코폴로’로 불리는 이유다.

최부는 부친상을 당하고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자 무덤에 움막을 짓고 4년을 머무르며 효를 다했다. 어버이 3년 상이 끝나자, 1492년(성종 23), 성종은 최부에게 사헌부 지평(정5품)을 내린다. 그때 간관들은 최부가 부친상을 당했는데도 상을 치르지 않고 어명을 받들어 ‘표해록’을 찬한 것을 허물로 삼아 공격했다. 아무리 어명이라고 해도 시묘살이 대신 ‘표해록’을 찬한 행위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관의 공격은 1494년(성종 25) 4월, 홍문관 교리( 정5품)에 임명될 당시도 이어졌다.

이때 홍문관 학사들은 성종에게 “최공(최부)은 잇달아 초상을 당해 4년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으며, 효행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원컨대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며 변호했다.

마침내 최부는 41세에 벼슬아치의 꽃이라는 홍문관 교리에 임명됐고, 이어 대제학에 오를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는 벼슬인 예문관 응교(정4품)에 오른다. 성종이 최부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갑자사화에 연루, 참수되다
성종을 이어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1496년(연산군 2), 최부는 사간원 사간(종 3품)에 임명된다. 조선시대 사간원은 임금의 잘못된 명령과 행위를 비판하고, 신하들의 행위를 따져 묻는 중요한 부서였다. 이 두 가지 중요 임무를 간쟁(諫爭)과 논박(論駁)이라고 부른다.

최부는 대쪽 같은 선비였다. 1497년(연산군 3) 3월, 최부는 연산군에게 ‘오락을 멀리할 것’ 등 5가지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연산군은 사간직에서 내친 후 중국 황제의 생일 축하사절단의 ‘성절사질정관’(聖節使質正官)으로 임명해 버린다. 관례에 없는 일로, 연산군의 보복이었다.

다음해인 1498년(연산군 4),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1498년이 무오년이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士禍)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초(史草, 사관이 기록해 둔 사기의 초고)인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원인이 돼 일어났으므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부른다.

‘조의제문’의 당사자인 김종직이 총애하는 제자이기도 하고 연산군의 눈 밖에 났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에 유배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 다시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윤씨 사건에 대한 보복과 왕권 강화를 위해 일으킨 대규모 숙청 사건이었다.

최부에게 다시 곤장 100대가 더해졌고 노비로 강등된 후 거제도로 유배지가 바뀐다. 한 달 후 연산군은 “이원·최부 같은 자들은 두어 보았자 어디에 쓸 것인가. 반드시 엄중히 징계한 뒤라야 사람들이 경계할 바를 알 터이니, 모두 잡아오라”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고 이어 내린 명령이 “최부·이원을 참(斬)하라”였다. 최부의 나이 51세였다.

최부가 참형에 처해지자, 당시 사관은 “최부는 공렴(公廉) 정직하고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하였고, 간관이 되어서는 아는 일을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이때 와서 죽임을 당하게 되니 조야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라는 기록을 남긴다. 최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사관마저도 입을 다물지 않았던 것이다.

최부의 명예 회복, 즉 신원은 1506년(중종 1) 최부가 참수된 지 2년 만에 이뤄진다. 중종은 최부를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정3품)에 추증한다.

- 호남 유학 개산조(開山祖)로 불리다
금남 최부는 나주 출신이었지만 해남 정씨에게 장가들면서 주로 해남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유희춘이 남긴 ‘금남선생사실기’에서 보듯 해남은 본디 궁벽한 바다 모퉁이에 있어 예로부터 문학하는 선비가 없고, 예의 또한 황폐한 고을이었다. 문학이 황폐한 고을 해남에서 최부는 세 명의 제자를 기른다. 윤효정과 임우리, 유계린이 그들이다.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윤씨로 1501년(연산군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자녀 교육에 전념했다.

그의 세 아들인 윤구, 윤행, 윤복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 중 윤구는 최산두·유성춘과 함께 호남삼걸로 불렸다. 윤효정이 닦은 가문의 기반 위에서 이후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등이 배출돼 학문과 예술의 꽃을 피운다.

최부의 세 제자 중 한 분이 임우리다. 임우리의 부친 임수는 영암에서 태어났지만, 해남정씨와 혼인하면서 해남과 인연을 맺는다. 임우리의 바로 위 형인 임우형의 다섯 아들 중 임억령·임백령·임구령이 관직에 진출한다. 석천 임억령이 호남문단에 끼친 영향 또한 대단했다. 임우리는 즉 석천 임억령의 작은아버지, 숙부였다.

최부의 제자 유계린은 최부의 사위다. 그리고 유계린의 두 아들이 호남삼걸로 일컬어지는 유성춘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미암 유희춘이다. 최부의 사위로 나주나씨인 나질도 있다. 나질의 아들이자 최부의 외손자인 나사침은 효행과 학행으로 천거받아 현감을 지냈다. 나사침은 나덕명, 나덕헌 등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최부의 외증손자 여섯 명 모두는 ‘육룡’(六龍)이라는 별호를 들을 정도로 명망이 높은 문사들이었다.

최부의 무덤은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늘어지 마을 뒷산에 부친 최택의 묘소 아래에 있고, 그가 태어난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에는 ‘금남최선생 유허비’가 서 있다.
최부 무덤(무안군 몽탄면)

금남 최부 사적비(무안군 몽탄면)

금남 최부 유허비(나주시 동강면)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광주시 광산구 월계동에는 1927년 탐진최씨 문중에서 세운 무양서원이 있다.

무양서원에는 고려 인종 때의 어의로 탐진최씨의 시조가 된 최사전을 주벽으로, 최윤덕과 최부, 유희춘과 나덕헌 등 다섯 명을 배향하고 있다. 강진군 군동면의 강덕사와 해남군 해남읍 해촌사에도 최부가 배향돼 있다.

미암 유희춘의 제자로 큰 이름을 날린 허균의 형 허성은 금남 최부에 대해 “웅대한 문장과 곧은 절개로 큰 명성을 날렸다”라는 찬사를 올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Copyright © 광주매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