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게 여성은 또 다른 식민지였다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4)]

유혜연 2025. 6. 1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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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경계에서 다시 만난 이름들(下)
‘그대는 독립적일 수 없다’는 올가미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 경찰에 연행된 여성 피의자들이 받았던 신문 상황을 재현한 장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판단보다 ‘순종 여부’와 ‘여성다움’이 신문의 기준이 됐다. 그날의 질문은 ‘왜 참여했는가’가 아니라, ‘왜 여자인데도 참여했는가’였다. AI를 활용해 재구성한 이미지.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미드저니 재가공

1919년 봄, 만세운동이 끝나자 수많은 여성이 일제 경찰에 연행됐다.

그들이 법정에서 남긴 신문(訊問)조서 속 문장들은 이상할 만큼 닮아 있었다. 거리로 나서기 전, 이들은 분명 회의를 열고 조직을 논의했으며 자금을 모으고 지방과의 연계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경찰과 사법부 앞에서 이들 대다수는 “정치에 관심 없다”거나 “친구를 따라갔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 말들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정치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조서에선 여성성만이 문제시됐고 주체적 판단보다는 순종 여부가 심문의 기준이 됐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이 지난 3편(5월29일자 11면 보도)에 이어 3·1운동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호명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 말들의 맥락을 추적한다. 왜 여성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축소하거나 부정해야 했는가. 그리고 그 침묵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독립운동에서 어떤 자취를 남겼는가.

1919년 봄, 수많은 여성들 일제에 연행
주체적 판단보다 순종여부가 심문 기준
정치적 결단을 단순 ‘일탈’로 여긴 시선
감옥에서 조롱 대상이 되는 여성의 신체
조서속 ‘정치에 무관심’ 생존 위한 전략

■“정치에 관심 없다”… 반복된 말의 이면

3·1운동 이후 경찰에 연행된 여성들의 신문조서에는 익숙한 문장이 되풀이된다. 누군가는 “친구를 따라 나섰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자금 이야기는 들은 적 없다”고 답했다. 스스로를 정치와 무관한 존재라고 강조하는 진술들이 유독 눈에 띈다. 겉으로는 무지하거나 수동적 태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가 강요한 생존 전략이 숨어 있었다.

나혜석(1896~1948)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러 개성과 평양까지 다녀온 인물이다. 그러나 조서에서는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친구를 따라 나갔을 뿐입니다”라고 진술했다. 1

황애시덕(1892~1971) 역시 여성단체 구성과 간사 선출을 주도한 인물이었지만, 신문조서에서는 “자금 이야기도 나왔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2

그러나 같은 해 사법부가 내린 판결에서는 이들의 역할을 전혀 다르게 규정했다. 1919년 6월 대구지방법원은 황애시덕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총무로 지목했고, 김마리아(1891~1944)와 함께 단체의 규칙과 취지서를 저작한 책임자라고 판시했다. 3

이는 조서의 진술이 단지 ‘사실의 부정’이 아니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언어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신문조서 곳곳을 살펴보면 일제 경찰·검찰과 사법부가 여성들에게 던진 질문은 ‘정치적 판단’보다는 ‘도덕성’ ‘사생활’ ‘종교’에 집중돼 있었다. 김마리아에게는 이런 질문이 이어졌다.

“그대는 예수교를 믿는가?”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닌 적이 있는가?” 4

이 같은 질문은 여성의 정치적 결정을 정당한 판단이 아니라 ‘일탈’로 여긴 시선에서 비롯됐다. 황애시덕은 신문 과정에서 이렇게 추궁받았다.

“그대가 정말 주동자인가?” “누군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닌가?” 5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예심판사 호리 나오요시는 여성 피의자들에게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런 일에 가담했는가”라고 추궁한 뒤, 월경 주기가 언제인지를 반복적으로 물었다.

당시 17세였던 이화학당 재학생 유점선(1901~?)은 “매월 20~25일에 시작하는데 이번 달은 아직 없습니다”라고 답해야 했다. 그에게 던져진 질문은 ‘누가 지시했는가’도, ‘왜 만세를 외쳤는가’도 아니었다. 일제 경찰은 여성 피의자의 월경 주기를 캐물으며 심문을 시작했다. 사건의 전후 맥락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 피의자의 여성성을 상기시키고 굴욕감을 조성하기 위한 신문 기법이었다. 6

질문은 답변보다 오래 남았다. 조사실 안에서는 여성의 몸을 언어로 호출하고 사적 경험을 공적 수치심으로 전환시키려는 전형적인 젠더 권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신문은 여성의 이성적 판단과 정치적 결단을 인정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작동했다. ‘여성다움’이라는 기준은 피의자의 신빙성을 흔들고, 태도를 문제 삼으며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 이용됐다. ‘왜 참여했는가’라는 질문은 이들에게만 ‘왜 여자인데 참여했는가’로 바뀌었다.

성차별은 신문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감옥에서도 여성의 몸은 공권력의 대상이자 조롱의 도구였다. 여성들은 경찰서와 감옥에서 옷을 찢기거나 발가벗겨진 채 신체검사를 당했다. 가슴을 노출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옷이 찢겼으며, 저울로 몸무게를 재는 명목하에 남성 간수들 앞에서 나체 상태로 조롱당했다. 7

그들은 독립운동가로 체포됐지만, 일제 치하 법과 공권력은 끝까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식민지 법정은 여성의 독립운동을 정치적 행위가 아닌 통제받아야 할 감정적 행동으로 다루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는 여성 피고인의 판단 능력보다는 감정적 동요, 남성의 선동 여부 혹은 ‘순종 여부’가 쟁점이 됐다. 실제 판결문에서도 ‘남학생의 말을 듣고 경솔하게 행동했다’ ‘감정에 휘둘려 판단력이 부족했다’는 취지의 표현이 반복된다. 이처럼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는 이성적·조직적 행위로써가 아니라, 일시적 감정 폭발이나 외부 영향에 의한 ‘충동’으로 축소되고 왜곡됐다.

나혜석의 신문조서.

재판 과정도 감정적 동요·순종이 쟁점
판결문 “남학생의 말 듣고 경솔” 적시
이화학당 회동 관련자 모두 면소 결정
결국 기숙사 모인 11명, 일부만 기억돼
일제 권력·제도가 침묵을 강제한 구조

■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의 진짜 의미

신문조서와 판결문 사이의 간극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를 말없이 증명한다. 이화학당 11인 회동에 대해 박인덕(1896~1980)은 회의 당시 자금 논의가 “다음으로 미뤄졌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간사로 지명된 사실은 인정했지만 “그 일은 미결 상태로 남았다”고 진술했다. 신준려(1898~1980) 역시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자”고 말했다며, 자신이 주도한 정황을 의도적으로 흐렸다. 그러면서도 신준려는 “간사 네 명이 정해졌고, 휴교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고 구체적 내용을 진술했다. 다만 초기에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했다가 경찰의 지적 후 “사실은 있었다. 오늘의 진술이 사실이다”라고 번복했다. 8

이 모순은 회피가 아니라 방어다. 그리고 법정은 때때로 이 방어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내려진 또 다른 판결에서는 김마리아, 나혜석 등 이화학당 회동 관련 여성들의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해당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모두 면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9

결국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은 그저 피동적 언어가 아니었다. 실제로 형벌을 피할 수 있었던, 살아남기 위한 말이었다. 이 말은 조직의 부정이 아니라 조직의 보호였다.

이런 전략은 책임의 경계선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감췄지만 조직을 배신하지 않았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은 기억하고 있던 것의 반대말이었다.

김마리아의 신문조서.


■ 조서의 끝에서, 다시 불리는 이름들

1919년 3월, 기숙사 방 안에 모였던 11명의 여성. 그들 각자에게는 역할과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일부의 이름만이 공적 기록에 남았고 나머지는 한두 줄의 진술로 축약됐다. 회의 간사였는지, 자금을 맡았는지조차 가려진 채 이들의 존재는 ‘기억되는 방식’에서 점차 밀려났다.

신문조서에는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보다 말하지 못하게 된 사유들이 선명히 드러났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 정당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존재로 취급받은 이들. 그들에게 “누가 시켰느냐”는 질문은 끝없이 반복됐고, “왜 여자면서 이런 일을 했느냐”는 심문은 늘 따라붙었다. 때론 월경 주기를 묻는 황당한 질문으로, 신체를 드러내라는 모욕으로, 그렇게 말(言)은 꺾이고 흔들렸다.

이 침묵은 단순한 개인의 전략을 넘어 일제 권력과 제도가 강제한 구조였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의 진술은 기록으로 남아 ‘독립운동’이 됐고, 어떤 이들의 선택은 회피로 간주돼 ‘기억’의 조건에서 탈락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조서를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지 잊힌 이들을 복권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왜 침묵했는지, 어떤 구조 속에서 배제됐는지를 짚어보기 위해서다.

기억은 이름을 떠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남은 말과 사라진 말의 차이를 살피는 일, 그 틈에서 배제된 목소리를 다시 찾아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말하지 못한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출처] 1) ‘나혜석 신문조서’, 1919년 3월18일 2) ‘황애시덕 신문조서’, 1919년 3월21일 3) ‘황애시덕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20년 6월29일 4) ‘김마리아 신문조서’, 1919년 4월3일 5) ‘황애시덕 신문조서’, 1919년 4월7일 6) 조한성, ‘만세열전’, 생각정원, 2019 7) 위와 같음 8) ‘신준려 신문조서’, 1919년 3월 20일 9) 김마리아·나혜석 등 면소 판결문, 조선총독부, 1919년 ※참고 문헌: - 장영은,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 - 3·1운동과 여성의 정치 참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 소현숙, ‘3·1운동과 정치 주체로서의 여성’, 한국학논총, 2019 - 최은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문이재, 2003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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