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9장] 영광·함평·나주·무안 동학농민군(163회)

민종렬은 동학농민군사가 더욱 큰 세력을 모아 나주목을 침탈하는 것으로 단정지었다. 그는 나주 동학농민군 세력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전통적으로 왕권을 뒷받침해주는 세력이 나주 유림들이고, 이는 영남 사림학파의 야성(野性)과 대비되는 친왕권적 친체제적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조선왕조를 볼 때, 중기 이전까지 나주의 과거 급제자가 전국 으뜸이었다. 조선왕조 최융성기였던 성종 대에는 한 해 나주 유림 교생 10명 전원이 과거에 급제한 일도 있었다. 한해 20명 안팎의 급제자를 선발한 것에 비하면 과거를 싹쓸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조선왕조 사백 년 동안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나주향교는 그만큼 유림 위력이 대단하였다.
향교 또한 전국의 향교 중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기세등등한 민 왕후의 척족인 민종렬이 서슬퍼런 목사인데도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가 웅장하게 자리잡은 나주향교의 돌담길을 지나갈 적시면 공연히 쫄았다. 그만큼 나주 향교의 권위와 위엄이 있었고, 왕권을 뒷받침해주는 병풍 역할을 하는 곳이어서 민종렬 역시 존경과 추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고장이 불한당 같은 동학농민군이 번성하는 텃밭이 되었는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혹, 영남지방이라면 모른다. 주로 사림파 유림으로 구성된 영남은 국초(國初:조선건국 초기), 벼슬에서 소외된 것을 기화로 왕조에 비판적이면서 대신 도덕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하였다. 충절사상에 기초하여 교조적 성리학과 재야성의 학문적 위상을 정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들 학파는 조선 초기 이래 왕실 측근에 머물면서 형성한 기호학파의 유자(儒子) 집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문자 그대로 지방에서 후학을 기르며 중앙 정치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호남은 기호학파의 한 유파로서 친체제적 기득권을 유지해왔고, 그중 나주목이 대표적 인재 등용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기축옥사 이후 호남인의 배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주의 유림 인맥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자에 들어 이 지역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무리가 조직적으로 확장되어가고 있다. 특히 나라의 녹봉을 먹은 자들 중 주경로, 김응문, 이태형 등 일부가 동학 무리의 지도자로 우뚝 서고 있다. 그것이 요상한 것이다. 같은 유림이라고 해도 전통적 유림 체계를 고수하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어 등장한 것이다.
민홍렬은 점심 식사 후 잡색군장(雜色軍長)을 불렀다. 잡색군은 상시적인 전투력이 아니라 유사시에 동원되는 예비군 성격을 띤 군사조직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으나 지방관에 따라 이 제도를 계속 유지하는 곳도 있었다.
나주목은 후자 쪽이었다. 향토 방위를 위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정규군과 달리 기강이 해이해져 있는 조직이었으나 지방의 민심과 소요 상황을 알아보는 데는 적합한 조직이었다. 그래서 민종렬이 잡색군장을 부른 것이었다.
"내 알기로, 이 지역 출신 정정식, 이정헌, 강해원이란 인물이 공주와 삼례에서 열린 동학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거기에 오중문(오권선), 전유창, 강대열, 천천옥, 김진선 등이 백산기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농민군을 결성하여 영광·함평을 점령하고 나주성으로 들어온다는군. 기왕의 배상옥, 김응문, 주경로, 강영희, 임종량이 최경선 부대와 함께 합류하여 나주성을 공격하고자 들어올 것이라는 첩보인데, 한번도 아니고, 여차하면 쳐들어오는 저의가 무엇이냐.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나주성을 공격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됩니다."
잡색군장이 눈을 껌벅이며 답하였다. 민종렬이 대번에 화를 냈다. 이 자도 한 패거리인가.
"그것이 말이 된다고? 왜 그러느냐?"
"저 새끼들이 나주목의 병참고에서 무기를 훔쳐갔는디, 그 뒤로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와부렀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