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희망고문에… 주민들 “위험해도 버티고 살아” [심층기획-‘등본에 없는 마을’ 못 떠나는 주민들]
서울 마지막 달동네 ‘개미마을’
세계일보, 133곳 주거지 환경 실태 조사
주민 절반이 “자연재해로 집에 피해”
60% “균열·붕괴” 68%“개보수 필요”
市 “재개발 땐 이중경비” 교체 거부도
주민 안전도 복지도 ‘사각지대’
도시가스 없어 부탄가스·연탄 사용
화재 취약 목재조립식 패널 건물들
계단·산비탈에 소방차 진입 어려워
상당수 무허가주택… “땜질 수리만”
지난 2월 화재사고로 한 80대 노인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숨졌다. 허름한 가건물에 살고 있던 그는 라면을 끓이다가 번진 불로 변을 당했다. 추운 겨울 제대로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서러운 생을 마감한 것이다. 노인이 생전 생활하던 곳은 바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린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개미마을’이었다.
<세계일보 2025년 2월12일자 10면 참조>
화재가 발생한 개미마을은 서울 도심지에서 차로 15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주위에 고층의 아파트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유독 개미마을만큼은 건축물의 높이가 한참 낮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과 이농민이 주먹구구식으로 지은 집들이 지금도 대부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스조차 공급되지 않은 탓에 상당수 주민이 부탄가스나 연탄으로 생활하고 있다. 사고로 숨진 노인 역시 부탄가스를 사용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민 절반 “자연재해로 피해”
비탈진 언덕에 자리 잡은 개미마을의 꼭대기에는 눈에 띄는 집 한 채가 있다. 나무 지지대와 장판, 파란 포대 등이 기대어진 채 가까스로 집의 형상을 한 이곳에는 A(85)씨가 거주하고 있다. 금이 간 벽 사이로 비바람이 들어왔지만, 덧대어놓은 얇은 플라스틱이 A씨를 지켜줄 뿐이었다. 무너진 집을 땜질해 사는 집이 개미마을에는 적지 않다.
본지 실태조사 결과, 개미마을에서 최근 1년 내 ‘자연재해로 집에 피해를 입었다’고 답한 주민은 전체 응답자(53곳)의 56.6%(30곳)로 거의 절반에 육박했다. 피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균열·붕괴’가 60%로 가장 많고 ‘누수’가 40%로 그 뒤를 이었다. 주민 박이현(62)씨는 “주먹 2개보다 큰 돌이 마당으로 몇 번 떨어진 적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10년 이내 개·보수를 한 적이 없다는 주민이 48명 중 16명(33.3%)이었다. 이들 중 5명은 ‘수리비용이 부담돼서’라고 답했다. 재개발이 예정돼 있어 굳이 수리하고 싶지 않다는 주민도 2명 있었다. 한 주민은 “지붕이 석면 슬레이트라 서울시에 교체를 요청했지만 재개발이 되면 이중경비가 들어 할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단단한 암반이 가파르게 형성된 인왕산 자락에 있는 마을 특성상 낙상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폭우·폭설 때 낙상사고를 겪은 적이 있다고 답한 주민은 30%에 달한다. 마을에 있는 아스팔트 도로와 떨어진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불규칙한 시멘트 계단 단차를 오르거나 파손된 계단을 피해 움직여야 한다.

개미마을에는 도시가스가 설치돼 있지 않은 탓에 상대적으로 화재 위험이 높지만, 화재 대비는 사실상 무방비한 수준이었다. 오래된 건축물이 화재에 오래 견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 변변치 못한 도로에는 소방차가 진입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실태조사 결과 개미마을에 소재한 상당수의 건물은 화재에 취약한 목재나 조립식 패널로 지어졌다. 국토교통부가 정한 ‘최저 주거기준’을 보면 주요 구조물은 불에 잘 타지 않는 재질로 지어야 하지만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 가구가 29%에 달했다. 화재 초기 빠른 진화를 돕는 화재경보기가 설치되지 않은 집 또한 60.8%에 달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대로다. 개미마을에는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아 주민 대다수가 부탄가스 버너나 연탄 등을 이용해 난방과 조리를 하기 때문이다. 실태조사 결과 난방 수단으로 기름보일러를 쓰는 가구는 10곳 중 7곳(72.7%) 수준이었다. 연탄보일러(61.8%), 연탄·장작 등 재래식 아궁이 및 대형 전기 히터(9.1%), 프로판가스(LPG)(7.3%), 태양열 등 전기보일러(7.3%)가 그 뒤를 이었다.

개·보수 또한 쉽지 않다. 건축법 제11조는 건축물을 건축하거나 대수선하려면 지자체장 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무허가건축물은 원칙적으로 모두 철거대상이지만, 1987년 이전 지어진 무허가건축물에 대해서는 일부 수리가 가능하도록 예외를 두고 있어 기존 면적 범위 내에서만 개·보수가 가능하다.
개미마을에서 48년째 살아오고 있는 김모(70)씨는 “고친다고 해봐야 직접 시멘트 반죽을 만들어 벽에 난 구멍이나 균열에 바르는 정도”라며 “시멘트를 살 돈도, 여기까지 배달시킬 돈도 없기 때문에 이제는 아쉬운 대로 감수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구청이 지붕 교체를 주택 확장으로 처리했다”면서 “무허가주택은 확장이 불법이라 매달 224만원을 내라는 공문이 날아온다”고 말했다.
재개발 논의가 기약 없이 지속되는 것도 주민들이 집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다. 개미마을을 둘러싼 재개발 논의는 그린벨트가 해제된 2006년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이른다.
김씨는 “재개발이 봄에 된다, 가을에 된다, 계속 말이 바뀌어서 고치지도 못한다”고 밝혔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홍제동 개미마을 일대는 불법 거주 형태가 많다 보니 공공기관 입장에서도 원칙적으로 지원하기 쉽지 않다”면서도 “노후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보니 주거 복지 차원에서 구청이나 시에서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민주·임성균·소진영·윤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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