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방위군 투입→시위 격화→해병대’... 트럼프에 낚인 LA
9일 오후 10시(현지 시각) 찾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내 리틀도쿄(일본인 타운) 거리는 전쟁터 같았다. 중무장을 한 LA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치고 시위대와 대치 중이었다. 왕복 4차선 도로 여기저기에 자동차, 나무, 쓰레기 등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경찰이 쏘는 최루탄, 고무탄 총성이 끊임없이 들려왔고 주먹만 한 돌멩이가 마구 날아다녔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탓에 눈이 쓰라리고 기침이 나왔다. 시위대는 모두 두건이나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다.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우두두두’ 굉음을 내며 전조등으로 시위대를 비췄다. 총성과 폭발음, 연기와 섬광이 난무하는 시가전 그 자체였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불법 이주자 단속으로 촉발된 LA 시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해지고 있다. 지난 6일 시위가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화염병이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가 지난 7일 주 방위군 투입 방침을 밝힌 뒤, 자극 받은 시위대는 점점 더 격렬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당시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트럼프의 주 방위군 투입 방침에 “의도적으로 (더 격렬한 시위를) 선동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는데, 실제 시위대가 선동당하면서 트럼프의 의도에 말려들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이날 백악관에서 “나는 내전을 원치 않는다. (시위를) 방치하면 내전이 될 것”이라고 군 동원을 정당화했다.
◇뉴섬 “트럼프 軍 동원 불법”… 트럼프는 뉴섬 체포 압박
연방 정부가 주지사의 요청 없이 주 방위군을 통제한 것은 1965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엔 앨라배마주 흑인 참정권 시위를 주 방위군이 과격 진압하자, 대통령이 지휘권을 가져온 경우로 이번과는 상황이 반대였다. 트럼프 정부는 주 방위군 2100명 외에도 해병대 700명을 추가 투입해 합동 진압 부대를 꾸렸다. 주 방위군과 해병대를 자국민 치안 유지 목적을 위해 동시 투입하는 것은 미국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렵다. 트럼프 정부의 대대적인 군 동원령에 뉴섬 주지사가 강력 반발하면서 연방 정부와 주 정부, 현직 대통령과 민주당 차기 대권 주자 간 갈등도 정면 충돌로 치닫고 있다.
9일 밤, 미국 LA 리틀도쿄 거리에서 트럼프의 이주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지금의 미국은 미국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본지 기자에게 자신들을 ‘폭도’로 규정한 트럼프에 대해 “우리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서 만난 에인절 울프는 “나는 멕시코·인디언 혼혈이지만 미국 시민권자”라며 “이주자를 몰아내는 정책에 결사 반대한다”고 했다. 거리 곳곳의 건물·벽엔 “X 같은” “나치 친위대 같다” 등 이민세관단속국(ICE)을 비난하는 문구가 스프레이로 적혀 있었다.
고무탄과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주 방위군에 흥분한 일부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졌고, 당국은 섬광탄·후추탄까지 동원해 진압 수위를 높였다. 현장은 이렇게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부 군중은 건물 앞 성조기를 내려 불태웠다. LA 시민 패티 레이는 “우리 조부모는 우루과이에서 온 이민자고 나는 이민 3세”라며 “엄연히 미국 구성원인 이들을 악마처럼 그리는 트럼프에게 맞서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본지가 LA 현장에서 만난 10여 명 시위자는 모두 미국 시민권자이자 이민 가정 출신이었다. 멕시코 출신 아멜리아 로드리게스는 “내가 사랑하는 미국은 이런 나라가 아니었다”며 “미국은 이민자의 국가다. 이민자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했다. 시위대는 “우리는 미국 시민권자”라고 했지만 경찰과 주 방위군은 “시위 자체가 불법이다. 모두 체포하겠다”며 폴리스 라인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한 외국 기자는 “체포됐다가 프레스(언론) 신분증을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풀려났다”며 “방탄복과 헬멧을 착용하라”고 했다. 여기저기 시위대 여러 명이 경찰의 고무탄에 맞아 다리를 절뚝이거나 팔이나 어깨를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시위 현장의 대치만큼이나, 캘리포니아 주 정부와 트럼프 정부의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방치하면 내전이 될 것”이라며 군 동원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여기엔 트럼프가 자신의 핵심 국정 어젠다인 ‘불법 이민 추방’의 추동력을 확보하고, 진보의 텃밭인 캘리포니아를 완전히 제압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트럼프가 이번 충돌에서 정치적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날 콜로라도주에 본부가 있는 북부사령부는 주 방위군 2100명과 해병대 700명으로 구성된 진압 작전 부대를 투입했다면서 “긴장 완화, 군중 통제, 무력 사용 기본 지침에 관한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첫 번째 집권 당시인 2020년에도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 퍼진 시위를 막기 위해 연방군을 투입하려고 한 적이 있다. 당시 각 주의 요청으로 주 방위군이 투입됐지만, 연방군 투입은 당시 마크 에스퍼 국방 장관이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에스퍼는 결국 해임됐는데, 현 국방 장관인 피트 헤그세스는 충성파로 트럼프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뉴섬 주지사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그는 트럼프의 주 방위군 동원 명령이 ‘불법 조치’라며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헌법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로 공포와 테러를 조장하고 있다”며 “이는 민주주의 위협이자 권위주의로 향하는 명백한 단계다.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뉴섬을 체포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는 이날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뉴섬을 체포할 수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자 “나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은) 멋진 일”이라고 했다. 뉴섬은 “대통령이 현직 주지사 체포를 요구한 건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것”이라고 반발했다.
뉴섬 역시 이번 사태를 존재감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재선 주지사인 뉴섬은 지난해 대선 때 ‘고령 리스크’로 낙마한 바이든의 후계자로도 거론됐다.
트럼프에게 반대하며 캘리포니아가 미합중국 연방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이른바 ‘캘렉시트’(CalExit) 구호도 재조명받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선 트럼프 첫 당선 때인 2016년과 지난해 트럼프 재선 직후 “캘렉시트하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LA 시위 사태 이후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소셜미디어에 ‘캘렉시트’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고 있고, 일부 활동가는 2028년 주민 투표에 캘렉시트 안건을 회부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미 50주 중 인구(3900만명)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는 지난해 주 총생산(GSP)이 4조1030억달러로 미 전체의 12%다. 실리콘밸리를 품고 첨단 정보기술(IT), 인공지능(AI) 산업을 선도하면서도 천혜의 자연 환경으로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캘리포니아가 독립한다면 미국·중국·독일에 이은 세계 4위 경제 대국이 된다는 추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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