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외롭고 창백한 점 하나

“천지가 한 번 생겼다가 사라지는 데에는 12만9600년이 걸린다. 긴 시간이라 할 수 있지만 현실 너머의 이치를 터득한 사람은 이것도 순식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 시간의 일부를 살아가는 사람이 장수한다고 해봐야 80~90년이니, 이는 순식간 중에서도 순식간이다. 그사이에 질병과 고통이 있다고 한들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기껏해야 얼마나 되겠는가? 이것이 내가 나의 병에 대해 너그러운 이유다.”
18세기 문인 조귀명이 자신의 병에 대해서 쓴 글의 첫머리다. 그는 어려서부터 평생 고질병에 시달렸다. 그런 만큼 병마와 싸우는 시간은 지겹도록 길고 길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을 무한히 긴 시간 위에 두고 봄으로써 거의 존재마저 무의미할 만큼 지극히 짧은 시간으로 만들었다. 남에게 주는 위로였다면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조귀명으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인식의 전환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 61억㎞ 거리에서 촬영한 지구 사진을 보며 했다는 칼 세이건의 말이 떠오른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이곳입니다. 저기가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알고 있는, 들어봤던,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이 바로 저 작은 점 위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쁨과 고통이 저 점 위에서 존재했고, 우리가 확신하는 수천 가지의 종교와 이념, …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이, 태양 빛 속에 떠다니는 저 작은 점 위에서 살다 갔습니다.”
온전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우주와 비교하면 지구는 보일락 말락 허공에 떠다니는 뿌연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듯한 서로를 향한 미움과 불화,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비극들이 이 지극히 작은 공간, 외롭고 창백한 점 하나 위에서 일어났고, 여전히 일어나는 중이다.
인식의 전환만으로 우리의 모든 아픔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면, 잠시 눈을 들어 우리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여기는 무언가가 언제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저 거대한 시간과 공간 위에 얹어두고 한번 바라볼 일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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