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늘보 보법으로 사서삼경을 통독한 그

고정국 2025. 6. 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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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22) 나무늘보 보법으로 

왼손에 오른쪽 귀, 오른 손에 왼쪽 귀 잡고
선착순 오리걸음 그 아득한 골인 지점에
까맣게 무릎을 꺾고 
"필-승 필-승!" 더듬던

나무늘보 보법으로 사서삼경을 통독한 그
공자님 시계초점은 세간보다 더디다며
딴따라 군가 행진도
반 박자씩 흘리던 그

선착순에 뒤쳐진 자가 필히 늦복을 누린다더라
육팔년 군대 동기가 말뚝 박고 산다는 여기
늘푸른 귤나무들과 
전우처럼 산다더라.

/2003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갖가지 여건 때문에 대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차라리 해군에 지원키로 마음먹었습니다. 군부대에서 필기시험 및 신체검사를 받고, 시골집에 막 도착했을 때, 동네 유선방송 스피커에서는 북한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는 긴급뉴스가 생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해군지원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짜를 며칠 앞두고 곧바로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 입소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무장공비 '김신조(2025년 4월 사망) 사태'가 터지면서 군 복무기간도 갑자기 3개월이 연장됐으며, 신병훈련소 훈련 강도는 이만저만 강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훈병중대에 충청북도 훈련병이 함께 했습니다. 머리는 아주 비상한 편이었지만, 몸동작은 늘 반 박자씩 늦었습니다. 선착순 기합도 늘 꼴찌였고, 재식훈련 걸음걸이가 어긋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훈련 12주의 막바지에, 진해 '천자봉 구보'라는 고난도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앞장서서 나를 부축하며 뛰었습니다. 

어쩌다 그 친구와 같이 같은 함정에 배치를 받고 수영점검을 받을 때, UDT부대에서 파견 나온 심판관들이 우리를 무조건 갑판에서 바다로 밀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수영이 많이 서툴렀습니다. 거기에다 바닷물이 처음이었는지, "야, 고 수병! 바닷물이 어찌 그리 짜다냐?" 바다에 뛰어들어 몇 차례 봉물을 먹었던 것 같았습니다. 오늘 낭송하는 「나무늘보보법으로」의 일면이 어쩌면 그 충청도 신 수병에 맞춰져 있습니다. 

가끔 "병장 이하 후갑판 집합!"이라는 함내 방송이 있었던 날이면 우리 동기들은 "오늘도 죽었다"하며 속으로 복창하기도 했습니다. 기수별로 엉덩이에 맞은 쇠파이프 '빳따'를 합한 수가 서른 대는 족히 넘었을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빳따'로 피멍 든 엉덩이를 쓸며 함수갑판 포대 밑에서 화랑담배를 나누워 피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지금도 충청북도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면, 맨 먼저 그때 신 수병의 목소리가 어제 일처럼 떠오르곤 한답니다. 참 그때, "야 신 수병! 그럼 강물 맛은 어찌 그리 싱거운 것이다냐?" 라고 질문할까 하다 그만 뒀던 일을 생각하며, 혼자 빙그레 웃을 때도 있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