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고려동 사람들 / 이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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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은 시조로 역사를 기술한다.
이숙경 시인의 고려동 사람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동 사람들은 역사의 재발견이요, 미학적 역사 복원의 한 전범이다.
고려동 사람들을 여러 번 새겨 읽으며, 묘하다는 생각을 연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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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동 사람들 / 이숙경
그날 배롱나무에 그는 말을 묶고/ 오늘 배롱나무에 나는 말을 거네/ 꽃이라 열꽃이라서 더 아팠을 꽃에게// 마을 저편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 튼/ 이름 모를 계보의 작은 새 날아드네/ 떨어진 붉은 꽃잎에 부리를 묻는 한낮// 이토록 담을 치고 수백 년 아로새긴/ 가변과 불변을 질러 발자취 따라가네/ 애틋한 불가항력에 날을 세운 대숲 길
『시조21』(2025년, 여름호)
시조시인은 시조로 역사를 기술한다. 이숙경 시인의 「고려동 사람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고려동은 모은 이오 선생이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로써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터전을 이룬 후 600여 년 선비의 충절이 이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고려동 사람들」은 역사의 재발견이요, 미학적 역사 복원의 한 전범이다. 단순한 회고나 단발성의 흥취를 표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동 사람들」을 여러 번 새겨 읽으며, 묘하다는 생각을 연신 한다. 진술과 묘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고, 오랫동안 사유하게 하는 구절로 말미암아 작품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된다. 역사적 현장을 시조로 쓰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시인은 도저한 깊이와 아득한 높이로 미묘하게 체현하고 있다.
첫수 초장과 중장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즉 그날 배롱나무에 그는 말을 묶고 오늘 배롱나무에 나는 말을 거네, 라는 대목은 시대를 초월한 격세지감의 교직이자 절절한 교감의 육화다. 오래전 그가 배롱나무에 말을 묶었듯이 나는 오늘 배롱나무에 말을 거는 일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서로 깊이 이어져 있는 상황이므로. 이때 등장인물은 둘이지만 홀연히 일체가 되는 시적 정황이 여실히 읽힌다. 하여 꽃이라 열꽃이라서 더 아팠을 꽃에게, 라는 종장은 깊은 울림을 안긴다.
둘째 수는 숨을 고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저편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 튼 이름 모를 계보의 작은 새 날아드네, 라면서 떨어진 붉은 꽃잎에 부리를 묻는 한낮의 정서를 조심스레 제시한다. 셋째 수는 또 한 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토록 담을 치고 수백 년 아로새긴 가변과 불변을 질러 발자취 따라가네, 라는 대목이 예사롭지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수에서 예견치 못했던 가변과 불변의 등장으로 「고려동 사람들」은 그 미학적 성취가 배가되고 있다. 화자는 그 상황을 가로질러 발자취를 조심스레 따라간다. 이렇듯 역사에 대한 진중한 태도에서 많은 느낌을 받는다. 더구나 종장은 애틋한 불가항력에 날을 세운 대숲 길, 이다. 더할 나위 없는 적실한 표현이다.
이렇듯 「고려동 사람들」은 전통적인 세계를 육화하면서도 무장 새롭다. 시조의 진경인지라 눈길을 쉬이 떼지 못한다. 괄목상대 그 이상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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