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포럼] 10년 전의 일- 김재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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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녀는 잘 웃고 노을과 바다와 새우깡을 따라다니는 배고픈 갈매기를 좋아한다.
바다가 연주하는 풍경, 신비로운 이 시간에 속하면 누구나 예쁜 마음일 텐데 하지만 그녀는 먼 지옥별에서 온 듯 어둠을 뒤집어쓰고 몰려오는 겨울 한기보다 차고 어두웠다.
무슨 일 있어요? 화난 거 같은데?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깨물듯 쪽쪽 빨더니, 아침에 기분 나쁜 전화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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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카페를 좋아한다. 그녀는 잘 웃고 노을과 바다와 새우깡을 따라다니는 배고픈 갈매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런 그녀가 좋다.
그녀는 길눈이 어둡다. 내비게이션도 소용이 없다. 직진만 하다가 삼십 분 늦어 도착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별로다.
노을을 곁에 두고 마주 앉았다. 바다가 머무르는 공간, 태양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물장구치는 오렌지빛 실내, 빛이 스며드는 저녁은 아름답다.
바다가 연주하는 풍경, 신비로운 이 시간에 속하면 누구나 예쁜 마음일 텐데… 하지만 그녀는 먼 지옥별에서 온 듯 어둠을 뒤집어쓰고 몰려오는 겨울 한기보다 차고 어두웠다. 모든 남자가 그렇듯 눈치를 살폈다.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일 있어요? 화난 거 같은데?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깨물듯 쪽쪽 빨더니, 아침에 기분 나쁜 전화받았어. 요즘 새파란 아가씨랑 소개팅한다며? 도대체 왜 그래? 나 하나로 부족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 그녀의 뺨은 노을보다 붉고 표정은 해적선의 찢어진 깃발 같았다. 언어가 이렇게 사나울 수도 있구나. 다시 천천히 알아듣게 말해 봐요.
K가 전화로 다 말했어. K랑 본 지 오래인데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새파란 아가씨? 파란색은 좋아하지만 소개팅은 대학교가 마지막이었는데…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K랑 P랑 요즘 어울려 다닌다더니…, 10년도 더 지난 일이야. 자기 만나기 훨씬 더 전이야. 그것도 주선자 P랑 함께 한 번 밥 먹은 게 다야. 얼마 전이라던데? 아니야, 기억도 가물거리는 오래 전이야.
그녀는 믿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믿을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갈증이 났다. 파도 소리는 더 몰려오고. 바닷물이라도 다 마셔 바닥이 드러나면 믿어줄까. 이게 진실인데…. 그냥 미안하다고 할까?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할까? 아니야, 뭐가 미안하냐고 또 다그칠 게 분명하다.
그녀는 겉옷을 챙겨 일어나려 했다. 이렇게 가면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이없는 곳에서 어이없이 이별할 수도 있구나. 억울했다. 이건 분명 사랑에 대한 재앙이고 테러다. 바다에 대한 테러이고 새하얀 갈매기에 대한 저주다.
갯바위처럼 가만히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사나운 파도에 휩쓸리다가 컴컴한 물속이나 어딘지도 모르는 섬에서 눈을 뜰 수도 있다, 물도 커피도 빵도 없는 혼자만의 섬에서.
P에게 전화할게요. 너무 억울해요. 이 위독한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이니까. 여보세요 오랜만입니다. 혹시 K에게 옛날 옛날에 아가씨인가 돌싱한 여자인가 소개팅한 거 얘기했나요? 미안해요,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재미로… 십 년도 더 지난 얘기를 왜 하나요? 더구나 소문내기 좋아하는 K에게 말입니다. 정말 죄송해요. 전화를 끊었다. 오해가 풀렸는지 금세 밝아지는 그녀… 변덕쟁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언어는 실종되고 진실은 미아가 된다.
진실은 찾을수록 어렵고 진실을 증명해야 하는 언어는 깊은 바다에 가라앉은 은귀고리 같아 진실은 어려워진다. 어떤 언어가 진실을 떠오르게 할까. 어느새 우리는 진실보다 거짓에 더 익숙해진 걸까.
바다가 넓게 보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늘지도 줄지도 않는 바다. 바다를 그녀와 나누려면 파도보다 긴 혀를 가져야 하겠지. 파도에 지쳐 허기가 졌다.
배 안 고파요? 해변 입구 중국집에 갔다. 짜장면, 난 짬뽕. 그녀가 앞접시에 짬뽕을 덜어 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밝음(在明)이 내려왔다. 혀가 짧아도 밝아서 진실한 언어만 소통되는 아름다운 지금을 소망한다.
김재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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