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2) 원광법사의 유학

원광법사는 신라에서 이미 학문의 깊이가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심오하였지만 주변의 추천으로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원광은 중국에서 여러 학자들을 만나면서 학문의 깊이에 심취하고, 불교에 대한 공부에 매달려 통달하게 됐다.
원광의 깨달음을 알아채고 주변에서 강의를 요청하며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게 됐다. 원광은 중국 각처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전쟁터에서 심오한 깨달음의 이치를 몸으로 드러내 감복을 받기도 했다.

◆신화전설: 원광의 유학
삼국유사는 속고승전에 실린 원광법사에 대한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 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진한 땅에 살았으며 조상의 풍습이 면면히 어어져 왔다. 또한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원광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으나 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 오히려 부끄러웠다. 드디어 친척과 벗들을 떠나 분발해 해외에 나가기로 했다. 나이 스물다섯 살에 배를 타고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 때문에 전에 의심스러웠던 것을 묻고 생각하여 해답을 얻고 도를 물어서 뜻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으나 그는 본래 속세의 서책을 익히 배웠으므로 신비의 궁구만을 이치라 여겼는데 불교의 교리를 듣고는 오히려 그것을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기게 됐다.

그리하여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 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 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임천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한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하여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드디어는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즉시 인간세상의 일을 끊고 성인들의 자취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세상 밖에 뜻을 두고 영원히 속세를 버리려 했다.
이 당시 산밑에 살고 있는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해서 좋은 질문이 오고 가며 겸하여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하여 마음에 꼭 들어 했다.
이로부터 옛 규칙에 따라 중생을 계도하고 교화함을 임무로 삼으니 법륜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강물을 기울여 쏟듯 세상을 불법으로 쏠리게 했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의 전도였지만 도에 젖어 결함을 송두리째 없애버림으로써 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 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라나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했다. 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하였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 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으니 원광이 위기에 임하여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수도로 와서 지냈다. 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장안에 높이 드날렸다.

◆스토리텔링: 원광법사의 신력
삼국유사에서 수이전에 실린 원광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을 소개한다. 동경(경주)의 안일호장인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의 원광법사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서울 사람이다. 처음에 승려가 돼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이 되자 조용히 살면서 수도할 것을 생각하고 홀로 삼기산에 살았다. 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비구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 그의 사람됨이 모질고 사나웠으며 주술로 수련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광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웠더니 홀연히 신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대의 수행은 참으로 좋구나.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이웃에 있는 비구는 대충 주술을 닦고 있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며 시끄러운 소리가 다른 사람의 고요한 사념을 뒤흔들고,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어 오고 갈 때마다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다. 법사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사람에게 말하여 옮겨가게 해주게나. 만일 오래 머문다면 어쩌면 내가 갑자기 죄 되는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했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말하기를 "제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비구가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 현혹됩니까? 법사께서는 어찌하여 여우귀신의 말을 듣고 근심합니까?"라 답했다.

신이 또 와서 "내 나이가 거의 3천 살로서 술법이 가장 왕성하다네. 이것은 하찮은 일인데 뭐 그리 놀랄 게 있겠는가"라며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기에게는 이로운 수행을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덕은 없을 것이네.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여 이 나라의 갈 길을 못 찾는 무리를 인도하라"고 했다.
법사가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 저의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험해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라 답하자 신이 중국으로 갈 계책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법사가 그 말을 따라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겸하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600) 경신에 법사가 신라로 돌아올 행장을 정리해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역시 신이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옴이 어떠하던가?"라 하니 법사가 대답하기를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라 했다. 신이 "나 또한 법사에게 계율을 주겠네" 하고는 윤회하는 세상에서 서로 구해주자는 약속을 했다. 법사가 "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만약 내 모습을 보려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보게나"라 했다. 법사가 다음날 아침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꿰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하기를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라 하니 법사가 대답하기를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고 더 할 수 없이 신이하였습니다"라 했다. 이 때문에 삼기산을 세속에서는 비장산이라고 불렀다.
신이 "비록 이런 몸을 가졌다 해도 덧없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 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라 했다. 약속한 날을 기다려 법사가 가서 보니 옻칠한 것과 같은 검고 늙은 여우 한 마리가 헐떡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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