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홍차 티백은 마시지 않는 이유
1970년쯤 고향에서 아저씨가 올라오셨다. 어머니가 홍차 티백을 내놓으셨다. 아저씨는 찻숟가락으로 티백을 꾹꾹 눌러 터뜨리셨다. 당황하신 어머님이 손 쓸 틈도 없이 아저씨는 찻잎과 찻물을 함께 쭉 마셨다.
그리고 아저씨는 당황하시고 뱉어내셨다. 홍차를 마실 때마다 우리 식구들은 "꾹꾹 눌러 터트린" 아저씨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수십 년이 흐른 뒤 식탁에 오른 홍차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2002년 봄 어느 날이었다. 식구 구성은 과거와 달랐다. 부모님과 나, 세 사람은 그대로였다. 누나와 형이 빠지고 아내가 포함되었다.
식도암으로 투병 중이던 아버지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분위기는 침울하였다. 식탁에서는 대화도 제대로 오가지 않았다. 현저히 여위신 아버지의 식사량도 얼마 되지 못하였다. 나머지 식구들도 부랴부랴 식사를 마감하였다.
홍차 티백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CD 한 장을 꺼냈다. 영국 스코틀랜드 재즈가수 캐롤 키드(Carol Kidd)의 「When I Dream」. 영화 《쉬리》의 주제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가 홍차와 분위기가 맞으리라 생각하였다.
![왼쪽 위부터 시계 순으로 홍차와 홍차티백(Mrs Robinson Tea Shop), 영화 쉬리 포스터(나무위키), 캐롤 키드 'When I Dream' CD 표지. [사진=유영현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07/KorMedi/20250607070013829zubi.jpg)
그러나 이 음악 선택은 큰 사고가 되고 말았다. 음악이 흐르니 어머니가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 어머니는 자식들의 우려에 비해서 굳건하게 버티었다. 눈물 한 번 비추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치료와 투병을 지켜보았다.
그랬던 어머니가 흐느끼자, 아연 긴장되었다. 노래는 감성을 자극하면서 더 고조되었다. 어머니는 급기야 오열하시며 입을 열었다. 흐느낌 속에 "한 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난다"라는 뜻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보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렸다. 어머니의 질병 경과는 아주 나빴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류머티스 관절염을 제대로 관리하는 전문의사가 없을 때였다. 대부분 의사는 스테로이드 호르몬 주사를 놓고 질병이 다시 악화하면 다시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놓았다.
급성기가 오래 지속되었다. 스테로이드 호르몬 과잉 사용으로 부작용도 나타났다. 부작용이 나타나 약물을 갑자기 끊자 금단 증후군으로 질병은 급속히 악화하였다. 요즈음은 사용하지 않는 골드염 치료까지 받았으나 일시적인 효과만 있었을 뿐이다.
아쉽게도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에 현재 가장 유용하게 사용되는 메토트렉세이트가 임상에 도입되기 전에 어머니의 류머티스 관절염은 이미 최악으로 치달았다. 급성기가 지나고 나서 약물로 증상을 일부 조정하면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변형된 관절은 인공관절로 대체하였으나 어머니의 인생은 이미 질병으로 뒤틀리고 말았다.
어머니가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고 말하신 이유는 좀 더 여유 있게 즐기고 누리지 못하셨다는 뜻이었다. 자식들 건사하실 때는 동시대 부모들처럼 언젠가는 '제대로 살아볼'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고 버티셨다.
50대에 관절염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막내아들인 내 교육이 끝났을 때 '제대로 살아볼' 기회가 왔을지도 모른다. 내가 미국 체류할 때 미국 여행도 오시고 여유 즐겼을 것이다.
관절염 초기에는
빨리 질병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질병은 낫지 않았다. 마침내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말기로 나아가자 '제대로 살아볼' 기회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날의 오열 속 짧은 말씀은 이런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난 나무보다 더 높은 집을 지을 수 있어요. 애걸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모든 선물을 받을 수 있어요. 나는 비행기 타고 파리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요. 이런 내가 왜 난 아무것도 없이 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건가요?
[후렴] 하지만 꿈을 꿀 때면 난 당신 꿈을 꾸어요. 언젠가 당신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꿈을 꿀 때면 난 당신 꿈을 꾸어요. 언젠가 당신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겠지요.
난 가수도 될 수 있고 어떤 광대 역할을 할 수 있어요. 나를 달로 보내줄 누군가를 불러낼 수도 있어요. 난 화장을 하고 다른 남자를 유혹할 수도 있고 그 남자 이름도 모른 채 혼자 잠자리에 들 수도 있어요.
[후렴 반복]"
「When I Dream」의 가사이다. 어려운 현실을 살고 있지만 꿈속에서라도 사랑과 갈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였다. 가사는 멜로디와 잘 어울린다.
《쉬리》에서 남한 정보요원 유중원은 이명헌을 사랑하는 따뜻한 남성이다. 그는 테러를 막기 위해 북한 특수부대 출신 킬러 이방희를 추적한다. 영화 후반부에 유중원은 연인 이명헌이 북한의 스파이 이방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중원은 혼란과 갈등에 빠지지만, 그녀가 일으킬 수 있는 더 큰 테러 위협을 막기 위해 연인을 죽인다. 그는 임무를 완성한 대가로 희생과 상처를 함께 체험하게 된다. 두 주인공이 평범한 연인으로 사랑할 때, 그리고 이명헌이 북한 스파이라는 점을 알게 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이 노래가 나온다.
어머니는 영화 《쉬리》를 보시지도 않았다. 「When I Dream」 가사도 전혀 몰랐다. 아마 그날, 이 노래를 처음 들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치 영화를 보신 듯, 마치 노래 가사를 아시는 듯 너무도 적절하게 오열하셨다. 적절하다는 표현이 옳지 않지만, 너무도 적절하였다.
운명처럼 만난 두 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운명이 아니면 맺어질 수 없었다. 각각 안동과 신의주에서 태어나 영화 주인공들처럼 남남북녀로 만났다. 신의주고보 학생이었던 어머니는 1948년 38선을 넘어 남하하셨다. 외할아버지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정착하시자 외할머니는 고명딸의 월남을 종용하였다.
서울에 온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서울에서 새 가정을 꾸린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생부와 결별하시고 남한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한국 전쟁 직전 남편을 운명처럼 만났다. 혈혈단신이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전부가 되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버지 소속 군대는 폭파된 한강을 넘지 못하였다. 군인들이 한강 주변에서 우왕좌왕하니 주민들이 옷을 들고 나타났다. 아버지도 그들이 가져온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버지는 아치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다행히 아치울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는 서울 수복까지 목숨을 지켜내었다. 북에서 내려온 어머니는 아버지 집에서 하인을 가장하여 지내며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 아치울: 6.25 당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아천리. 현재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소재한 마을 이름.)
서울 수복 후, 아버지는 다시 부대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은 다시 후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간호장교에 지원하여 피난하라고 권유하였다.
어머니는 간호 장교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그리고 즉시 임관하고 군 병원으로 이동하며 두 분은 이별하였다. 남은 전쟁 동안 두 분은 서로 연락도 되지 않았고 각각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한국전쟁 휴전 후
어머니는 휴가를 받아 서울로 올라와 결혼하고 부대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 후 결혼 생활 내내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사이좋은 부부로 사셨다.
"앞이 캄캄하던 시절 당신을 만났습니다. 참혹한 한국 전쟁 중에 연락이 끊어졌어도 그리움을 품고 살았습니다. 국가가 부유하지 않고 우리도 근근이 살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살아볼 날이 오리라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게 병이 왔고, 내가 이를 헤어나지도 못했는데 당신은 암으로 먼저 마지막 길을 가네요. 남은 세월 꿈에서 항상 나타나 주세요. 그리고 너무 오래 남겨두지 말고 일찍 데려가 주세요."
그날 한탄과 아쉬움을 터뜨린 어머니께 「When I Dream」 가사는 위처럼 들렸으리라.
나는 이후 홍차 티백을 끊었다. '정산소종'이나 '기문홍차'를 전엽(全葉)으로 우려 마시면 티백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과 향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홍차 티백에는 어머니 슬픈 얼굴이 묻어있고 어머니가 오열로 작시하신 「When I Dream」 가사가 적셔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차 티백을 마시는 분에게는, "잘게 부순 잎으로 만든 홍차 티백 대신 전엽 홍차를 다기(茶器)에 우려 드시라"고 괜히 간섭한다.
유영현 원장(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

유영현 원장 (yhyoo@d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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