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건축물이 환상이 될 때 - 살보, 슐츠, 벤투라

문소영 2025. 6. 7.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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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보(1947~2015)의 작품 '세 개의 기둥'(1990) [사진 글래드스톤 갤러리]
건축물을 주제로 한 옛 그림은 대개 기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시대부터 화가와 사진가들은 다양한 목적으로(빛의 효과, 사회 현실, 또는 도시인의 심리 등등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물을 작품에 담아왔다. 현실의 건축물이 작가의 의도에 따라 무척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연출된 작품도 있다. 바로 그런 작품들을 소개하는 전시가 마침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달 29일에는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이탈리아 화가 살보(1947~2015)의 개인전 ‘살보, 여행 중’이 시작했다.(7월 12일까지) 그는 최근 몇 년 간 국내 아트페어에 작품이 종종 소개되며 한국 컬렉터들의 관심을 받아왔지만, 국내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살보(본명은 살바토레 만조네)의 유족이 설립한 ‘살보재단’과 협업한 전시다.

살보의 유화 '무제' [사진 글래드스톤 갤러리]
살보의 유화 '슈투트가르트'(1994) [사진 글래드스톤 갤러리]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전시는 살보가 여행하며 보았던 풍경에서 영감 받은 그림들로 구성돼 있다. 재단 설립자인 살보의 딸 노르마 만조네는 서울 기자간담회에서 “아버지는 1969년 아프가니스탄 여행을 시작으로 평생 많은 곳을 여행했다”며 자동차 여행을 좋아했고 자신도 동행한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세 가지 장소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자주 말했다. 떠나기 전에 상상하는 곳, 지금 내가 있는 곳, 떠난 후에 기억에 남는 곳이다. 아버지의 그림은 이 세 장소를 (함께)표현하려는 시도였다. 그림 속에 현실과 상상, 기억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

살보는 초기에는 이탈리아의 중요한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에 참여했다. 자연이나 일상의 소재로 관람자에게 어떤 생각을 유발하게 하는 개념예술적 작품을 만드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1973년을 기점으로 구상 회화로 전환했고 76년부터 자신이 여행에서 본 풍경을 재창조하는 것에 주력했다. 튀르키예와 동유럽에서 본 첨탑과 돔을 다룬 ‘오토마니아’ 연작, 고향인 시칠리 섬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적, 특히 기둥을 다룬 연작 등을 남겼다. 건축물의 디테일을 제거해 그 추상적 양감을 강조하고 주관적 색채를 강조함으로써 ‘아르테 포베라’의 개념예술적 특성을 간직했다.

그런 면에서 살보의 회화는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사진전문미술관인 고은사진미술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독일 작가 요세프 슐츠 및 이탈리아 작가 파올로 벤투라의 작업과 통하는 점이 있다. 이 2인전(8월 8일까지)의 제목은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제목에서 따온 ‘두 도시 이야기’다.

요세프 슐츠의 사진 ‘사실적인 벽돌’(2003). [사진 고은사진미술관]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 학파가 기반인 슐츠(59)는 그의 연작 ‘사실적인’에서 공장·창고와 같은 산업 건물을 촬영한 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간판·창문 같은 기능적 디테일 및 시간의 흔적 같은 환경적 요소를 지우고 본질적인 형태와 색채만을 남긴다. 그렇게 변모한 모습은 현실의 존재임에도 얼핏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전시 개막일이었던 2월 28일 미술관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슐츠는 작업을 할 때 “사진을 단순한 기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데 중점을 둔다”고 설명했다. 즉 살보가 회화로 한 것을 슐츠는 사진과 디지털 후처리로 한 것이다.

파올로 벤투라의 사진+회화 ‘밀라노 4 08’. [사진 고은사진미술관]
그런데 상통하는 면이 있는 반면, 매체가 다르고 건축 풍경을 재창조한 맥락 또한 다르다. 슐츠는 주로 도시의 산업적·상업적 구조물을 다룬다. 또 다른 연작 ‘사인 아웃’에서는 미국의 광고판을 촬영한 후, 텍스트와 로고를 제거해 단순한 형태와 색감만 남긴다. “이를 통해 소비주의의 표면적 화려함 뒤에 숨겨진 본질을 탐구하며, 도시 풍경에 대한 사유적 시선을 제시한다”고 미술관은 설명한다.

슐츠가 사진에서 서사를 제거해 익숙한 도시 풍경을 새롭게 보게 한다면, 2인전의 또 다른 작가 파올로 벤투라(57)는 오히려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건축물을 촬영한 후 회화를 덧입힌다. 그 서사는 공간에 축적된 작가 개인의 기억과 시간의 흐름이다. 아티스트 토크에 화상으로 참여한 벤투라는 “나의 작품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밀라노의 건물을 촬영한 후, 필요 없는 부분을 제거하고 사적 이야기를 담아 완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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