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것들
[박준의 마음 쓰기] (29)

얼마 전 집을 크게 뒤엎었습니다. 새로 이사한 지 꽤 지났지만 여태 정리 못 한 짐 때문입니다. 그사이 불어난 살림살이가 더해져 집은 점점 비좁아졌습니다. 물건을 이고 지며 살아야 할 날이 멀지 않아 보였습니다. 과감하게 버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들인 공에 비해 소출은 적었습니다. 처음 생각과 달리 실제로 버린 물건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장 큰 적은 책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한번쯤 꿈꿨을 고즈넉한 서재의 풍경은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도서관 같은 체계적인 분류 역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저 책장에 앞뒤로 양단으로 꽂아둘 뿐. 이마저도 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신간은 도리 없이 바닥에 쌓여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버리기 위해서는 의외로 많은 시간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탐색하듯 천천히 책장을 넘겨봐야 합니다. 읽었던 책인지, 읽었다면 얼마나 기억에 남아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한번도 읽지 않았거나 읽은 기억이 남아 있지 않은 책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느 순간 높은 확률로 오늘 버린 이 책을 다시 사게 될 날이 올 테니까. 그렇게 저는 손에 쥐고 있던 청소 도구를 잠시 내려두고 뜻밖의 독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하나 버릴 수 없는 건 동료 작가들이 친필로 서명을 해서 보내준 책들입니다. 면지에는 보통 저자의 이름과 날짜 그리고 짧지만 다정한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혼자 지난한 시간을 모두 통과한 후에 처음 보내는 귀한 안부 같은 것.
책장 앞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저는 이내 서랍장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잡동사니가 가득해 여닫는 일조차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여행지에서 펼쳐본 낯선 도시의 지도, 박물관 입장권과 미술관 리플릿, 숱한 장소와 인문과 표정이 담긴 사진, 이제는 재생할 방법이 없는 가요 테이프와 콤팩트디스크 등이 첫 번째 서랍에 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서랍에는 온통 전자기기 차지였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구입한 디지털카메라와 MP3 플레이어, 비석처럼 크고 무거운 노트북 컴퓨터….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은 끈 것은 휴대전화였습니다. 단음의 기계음이 벨소리로 울리던 오래된 기종부터 화면에 금이 간 비교적 최신 모델의 스마트폰까지 그동안 사용했던 기계를 모아둔 것입니다.
세 번째 서랍을 열자마자 종이 냄새가 풍겼습니다. 살면서 받은 편지를 한데 모아둔 것입니다. 편지를 한 장 한 장 꺼내 읽다 보면 오늘의 정리는 요원한 일이 될 것임을 잘 알기에 저는 서둘러 서랍을 닫았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제 서랍장은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되팔아 돈을 챙길 수 있는 물건도 없습니다. 오히려 생활 폐기물 스티커를 구입해 붙여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책장을 떠나는 순간 폐지 취급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쓸모없다고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같이 모두 제가 한 시절을 소중하게 그리고 가까이 여긴 것들이니까요. 이것이 사라진다면 제 기억은 앙상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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