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을 부탁해[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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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동네 곳곳에서 잠복 중이다.
의연한 엄마인 척했지만, 겁도 부끄럼도 많은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나는 멀찍이 숨어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두부 좀 사다 줄래?" 이젠 제법 씩씩하게 심부름을 떠나는 아이들, 우쭐거리며 편의점에서 두부를 사 왔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나의 마지막 역할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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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좀 사다 줄래?” 첫 심부름은 자판기 심부름이었다. 지폐를 주고 각자 음료수를 뽑아 오라고 했다. 주뼛주뼛 자판기 근처만 서성이던 아이들에게 때마침 지나가는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지폐를 넣는 법, 버튼을 누르는 법, 음료수를 꺼내는 법을 알려주었다. 음료수를 트로피처럼 들고서 신나게 달려온 아이들. 감사 인사는 드렸는지 묻자 깜빡 까먹어 버렸단다. 잊지 못할 첫 심부름 이후 “우유 좀 사 올래?” “꽈배기도 사 오렴” “분리수거 도와줄래?” 아이들에게 시시콜콜한 심부름을 부탁했다.
“딸기 좀 사다 줄래?” 난도 높은 시장 심부름도 시켜 봤다. 작고 무른 거 말고 빨갛고 단내 나는 걸 고르라고 일러주고선, 인파에 숨어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세상 신중하게 딸기를 고르고 느릿느릿 계산까지 마친 아이들에게, 주인아주머니는 귤을 쥐여주었다. 그걸 어찌나 꽉 쥐고 돌아왔는지 말랑해진 귤이 뜨끈했다.
“두부 좀 사다 줄래?” 이젠 제법 씩씩하게 심부름을 떠나는 아이들, 우쭐거리며 편의점에서 두부를 사 왔다. 그런데 있지. 너희는 모를 거야. 엄마만 알아보았거든. 키가 닿지 않는 매대에서 물건을 집어주던 어른, 계산할 때까지 뒤에서 기다려준 어른, 나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던 어른. 무뚝뚝한 얼굴로 슬그머니 도와주는 어른들이 있었단다. 아이들의 좌충우돌 심부름은 실은 어른들의 은근슬쩍 역할극으로 완성되는 걸까. 다가와 눈높이를 맞춰 알려주던 어른, 뭐라도 하나 덤으로 보태주던 어른, 멋지다 대견하다 기특하다 칭찬해 주던 어른. 조력자 어른들의 조용한 활약이 빛났다.
심부름의 어원은 ‘남의 힘(심)을 부리다’라는 의미에 있다던데,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지켜본 심부름은 ‘남의 심(心), 마음을 부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마음과 마음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도움을 부탁하는 마음에 도움이 되고픈 어린 마음이 움직이고, 노고와 성취로 뿌듯해진 어린 마음에 기쁨과 보람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격려하며 도와주는 마음들이 숨어 있었다. 어색한 듯 무심한 듯 슬그머니 도와주는 어른들도 한때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새삼 흐뭇했다. 도움을 받아본 아이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는 어른으로 자랄 테니까.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에게 나의 마지막 역할은 뭘까. 양손 무겁게 의기양양해져 돌아왔대도, 빈손으로 울먹거리며 돌아왔대도 “수고했어” 껴안아 주며 찡. 아이들이 사다 준 두부로 찌개를 끓이다가 달아오르는 눈시울에 ‘고마워라’ 중얼거리며 핑. 자꾸만 찡. 자꾸만 핑. 하여간 아이들보다 눈물 많은 어른이라니, 나도 참 큰일이다.
고수리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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