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영생불사 흡혈귀도 탐낼 독창적 매혹 ‘씨너스: 죄인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33번째 레터는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씨너스: 죄인들’입니다. 올해가 절반 이상 남긴 했지만, 아마도 연말에 저의 ‘올해의 영화’ 명단을 만든다면 ‘씨너스’가 반드시 들어갈 것 같습니다. 꼭 보세요. 영화관에서요. 정말 독창적이고 멋진 영화입니다. 대부분 이런 수식어는 예술영화가 가져가는데 ‘씨너스’는 엄연히 대규모 흥행을 목적으로 만든 상업영화인데도 주제 의식부터 연출 방식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파고든 재능에 감탄하게 됩니다. 재밌는 영화 보고 싶다, 이러셔도 괜찮고 영화를 단순한 취미 이상으로 좋아하시거나 만드시는 분이라면 더욱 추천합니다. 포스터에 흑인 배우들이 많아서 혹시나 인종 문제 설교하는 영화 아냐 오해하신다면, 아닙니다, 전혀. 가르치려 드는 영화였다면 재미가 없었겠죠. 저희 지면 기사로 쓰긴 했는데 너무 어렵게 썼다고 베프에게 한소리 들었네요. 대단한 영화라는 걸 강조하려고 이것저것 팩트를 집어넣다가 정작 재밌는 영화라는 포인트가 전달이 못 됐습니다. 반성합니다. 그런 전차로 레터에선 쉽게쉽게 말씀드려봅니다.

저는 ‘씨너스’ 시사회를 무척 기다렸습니다. 미국에서 하도 시끄러워서요. 거기선 4월말에 개봉했는데 거짓말 조금 더 보태 난리가 났더군요. 박스오피스 1위는 물론이고 비평도 찬사. 마블 ‘블랙팬서’ 감독이 만든 청불 뱀파이어 공포영화라더니 무지 잔인한가. 흑인 감독이 흑인 인종 문제를 엄청 도발적으로 다뤘나. 제목은 왜 ‘씨너스(Sinners)’인가. 누가 죄인인건가. 궁금했습니다.
드디어 시사회날. 왜들 난리였는지, 영화 시작하고 10분도 안 돼 느낌이 왔습니다. “오, 이거 대단할 수 있겠는데.” 시사회를 용산CGV 아이맥스관에서 했는데 그 큰 화면이 꽉 차올랐다가 위아래로 불타다가 좌우로 광활하게 펼쳐지다가 다시 완전히 채워지는 실로 드문 경험을 했습니다. 게다가 감독이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 장르가 공포영화로 분류돼 있는데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흡혈귀가 피 묻히고 왔다갔다하긴 하는데 그 정도야 뭐. 저는 공포영화 내성이 매우 약한 편인데도(어지간하면 다 무섭습니다) 볼 만했습니다. 공포는 이 영화의 무게중심에서 좀 떨어져 있습니다. 흡혈귀는 일종의 비유일뿐 흡혈과 영생불사가 보여주고 싶은 주제가 아니라서요. 아니 그럼 뭘 보여주기에 그렇게 추천하냐고 물으신다면.
우선 어떤 이야기인지 살짝. ‘씨너스’는 한 흑인 청년이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온양 탈진해 비틀비틀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시작합니다. 손에 쥔 것이 있어요. 기타 목(neck)입니다. 몸통은 어디갔는지 보이질 않고 줄은 다 끊겨 너덜너덜한데 남은 목을 꼭 쥐고 놓질 않습니다. 그가 어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한창 예배가 진행 중인 교회입니다. 그의 이름은 새미, 교회 목사가 그의 아버지였던 거죠. 문간에 선 그의 얼굴, 흉측하네요. 볼 한 쪽에 뭔가가 할퀸 흉터가 선명합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말합니다. “기타를 버려, 죄인의 길을 걷지 않겠다고 약속해.” 무슨 말인가 싶은 그 때, 화면은 하루 전날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시작한 ‘씨너스’는 1932년 미국 미시시피에서 1박2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1932년은 의미가 있습니다. 흑백 차별이 일상이었고(‘씨너스’에서도 백인 전용 예약창구와 백인 전용 화장실 표지판을 꼼꼼하게 보여줍니다), KKK단이 활개를 쳤으며, 금주법이 여전했던 때죠(1933년 폐지). 금주법이 실제론 술 소비를 몇 배로 올렸다고 하던데, ‘씨너스’에선 음악 주점을 개업하려는 쌍둥이 형제가 어디선가 훔쳐온 맥주를 잔뜩 싣고 등장합니다. 우리의 주인공 스모크와 스택 형제입니다. 배우 마이클 B 조던이 1인2역을 하는데 관객이 구분하기 쉽게, 형인 스모크는 파란 모자, 동생인 스택은 빨간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형은 사업에 밝은 냉철한 성격이고, 동생은 즉흥적이고 정에 약해보이는 대조적인 성격으로 나옵니다. 젤 앞에 나왔던 새미와 쌍둥이는 사촌 간이에요. 새미는 사실 블루스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잘하기도 하고요. 목소리부터가 노래 진짜 잘하게 아주 굵고 기름지고 울림이 풍부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 바로 블루스입니다. 새미 아버지인 목사가 “죄인의 길을 걷지 말라”고 하면서 블루스를 포기하라고 하죠. 흑인들이 고달픔을 잊기 위해 부르던 블루스는 과거엔 사탄의 음악으로 여겨졌으니까요. 그러니까 블루스를 즐겨부르면 죄인, 즉 이 영화의 제목인 씨너스(Sinners)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씨너스는 흑인을 뜻하는 다른 말입니다. 혹은 블루스를 즐기는, 세상이 금지하는 도발과 다른 세계를 꿈꾸는 모든 이들이 될 수도 있겠군요.
영화에서 블루스 음악이 두드러지게 나와서 “아, 나 블루스 잘 모르는데”라며 거리감을 느끼신다면, 모르셔도 됩니다. 블루스는 자기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르일뿐,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주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잘 만든 영화가 그렇듯, 보편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풍부한 것이죠. 물론 음악 좋아하시면 더할나위 없고요. 새미가 불러낸 과거와 미래의 영혼이 한꺼번에 나타나 한바탕 파티가 벌어지는 시퀀스가 있는데 형용사 ‘압도적이다’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 장면 하나만 봐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습니다. 요즘 한국영화에선 왜 이런 상상력을 보기 힘든 걸까요.

쌍둥이는 새미를 새 주점에 초대합니다. 음식 만들 지인도 부르고(그 중에는 스모크의 전처도), 다른 연주자도 모아서 그날 밤에 음식 주점을 엽니다. 흑인 전용으로요. 흥부자들이 잔뜩 모여서 마시고 춤추고 노래부르는데, 이때 나타난 불청객. 백인 흡혈귀들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시면, 악인인 백인 흡혈귀가 흑인들 피 빨아먹는 비유구나 하실 수 있는데, 각본 쓴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뛰어난 게, 거기서 한 번 더 들어갑니다. 백인 흡혈귀가 이 영화가 겨누는 악인이 아닌 것이죠. 흡혈귀는 아일랜드계인데, 아일랜드계는 다른 백인들에게 핍박받던 백인입니다. 진짜로 흑인들 벗겨먹던 건 KKK단이고, 그들은 나중에 존재를 드러내요. 백인도 이중, 천대와 핍박은 삼중 이상인 시스템입니다.
이런 구조를 지극히 대중적인 장르로 이야기 뼈대를 잡고, 흑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블루스를 풀어넣어서 박스오피스 성공까지 끌어냈으니, 대단한 감각입니다. (‘씨너스’는 9000만달러 들여 만들어서 4억달러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역사와 정체성이라는 핵심은 확실하게 살리면서 장르적 문법은 누구나 알기 쉽게(흡혈귀는 마늘 싫어해) 그대로 뒀습니다.
새미는 아버지의 강권에도 손에 쥔 기타를 놓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 밤에 확실히 깨달았으니까요. ‘그 영화 어때’ 구독자 여러분도 꼭 잡고 놓지 마세요. 무언가 되고 싶은 희망, 어딘가 가고 싶은 소망, 어떻게 만들고 싶은 세상. 여러분이 놓지 않으면 여러분의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럼 ‘씨너스’의 새미는 어떻게 되느냐, ‘씨너스’ 마지막 쿠키 영상에 답이 들어있습니다. 궁금하시면 ‘씨너스’를 보시면 된다는~~ 꼭 보시라는~~.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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