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묘 역사 100년…강원에 심은 희망의 씨앗 숲 이루다

오세현 2025. 6. 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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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수탈 목적 양묘사업 전개
강릉·삼척 등 양묘장 잇따라 개설
치산녹화사업 마을양묘 활성화
재난 계기 노지→시설양묘 전환
산지 많은 강원, 산업 확산 기폭제
“기후위기 대응 양묘장 선진화를”

산림녹화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 11. 산림녹화의 뿌리 양묘

산림녹화 사업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는 양묘다. 양묘로 우수한 묘목을 길러낸 덕분에 묘목들이 산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으로 옮겨지기까지 나무 한 그루가 성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종류마다 다르지만 평균 2~3년. 양묘는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양묘산업을 짚는다.

▲ 강릉 사천면에 조성된 양묘장에 심어진 나무.

 

■ 일제 때 태동…치산녹화 때 전성기

우리나라의 양묘산업은 일제 때 시작됐다. 그 출발점은 역시 강원도였다. 한국양묘협회가 펴낸 ‘한국양묘협회 50년사’에 따르면, 1907년 일본인이 경성과 수원, 평양에 국영양묘장을 개설했고 1919년 울진양묘장이 개설되면서 본격적인 국유 양묘사업이 전개됐다.

그후 해방 전까지 1926년 춘양양묘장이, 1927년 강릉(옥천), 1937년 강릉(포남동)·삼척(교가1), 1938년 강릉(송정동)·삼척(교가2), 1943년 평창양묘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한국양묘협회는 “일제의 양묘 활성화 정책은 우리나라의 산림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라면서도 “우리나라 양묘기술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치산녹화사업이 시작된 1973년을 기점으로 양묘산업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치산녹화사업을 위해 산림청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이관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새마을사업과 치산녹화사업을 포함했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마을양묘가 시작됐다.

내무부는 1973년 새마을 장기계획에서 1981년까지 전국 3만4668개 부락을 대상으로 9억2500만본의 마을양묘 묘목을 육성하겠다고 했다. 산림청은 1973년 1만4255개 부락을 선정해 마을양묘사업을 추진했다.

마을의 호응은 높았다. 노동력은 높았으나 소득은 많지 않았기에 노동집약적이면서도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양묘산업은 마을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주민 중심의 양묘산업의 효과는 높지 않았다.

이로인해 1차 치산녹화기간(1973년~1978년) 산림사업용 묘목 생산량 중 37%를 차지하던 마을양묘는 2차 치산녹화기간(1979년~1987년)에는 11%로 비중이 대폭 줄었다. 생산 묘목도 9억5900만본에서 1억9500만본으로 급감했다. 마을양묘의 자리는 산림조합과 한국양묘협회가 대신했다.

▲ 안중걸 한국산림녹화 UNESCO 등재추진위원과 염돈호(사진 가운데) 제8대 한국양묘협회 강원도지회장, 염동준 제10대 한국양묘협회 강원도지회장이 강릉 사천면 양묘장 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오세현 기자

■ 시설 양묘 중심지 강원

사방사업이 그랬던 것처럼, 대형재난은 역설적으로 양묘산업을 키웠다. 노지양묘 중심이었던 양묘산업을 시설양묘로 전환했던 계기는 바로 1996년 고성 대형산불이었다.

1996년 고성지역에 대형 산불이 발생, 산불피해지에 있던 송이산을 복원해야 하자 경기 광릉 소재 중부임업시험장에서 비닐하우스 간이온실을 시설해 소나무 옹기묘를 생산했다. 산림사업을 위한 조림용 옹기묘 생산의 시초였다.

당시 노지양묘는 농촌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기후변화, 토양 개량의 한계 등 다양한 문제점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제8대 한국양묘협회 강원도지회장을 지낸 염돈호(84) 전 회장은 “2002년 태풍 루사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노지 양묘를 했었는데 수해를 입은 뒤 상황이 달라졌다”며 “고성산불과 루사같은 대형 재난을 겪으면서 조림양묘 관계자들이 ‘시설로 가야한다’고 해서 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산지가 많은 강원도 특성 역시 시설양묘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염돈호 전 회장은 “양묘는 씨를 심어 발화, 산으로 옮길 때까지 그 지역에서 해야지 나무가 적응하기 쉽다”며 “남쪽 동네에 있는 나무가 여기(강릉)로 오면 적응을 못한다. 그래서 양묘장이 조림지하고 가까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후위기 시대를 겪으면서 양묘산업도 변화의 기로에 섰다.

한국양묘협회 관계자는 “그간의 양묘사업은 정책 방향을 정해 추진했다기보다 시기별 조림정책을 뒷받침 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며 “산림정책이 안정기에 접어든 만큼 조림정책을 뒷받침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유양묘장 선진화와 조직배양 묘목 생산체계 확충 등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오세현·최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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