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장례식을 준비해 보자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 문화데스크
십여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오랫동안 고민 중 하나는 아빠를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였다. 도무지 꿈에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갑자기 사무치게 아빠가 그리워서 눈물이 나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늦둥이로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내가 이러면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못된 딸이었나 하는 괴로움을 털어놨더니 친구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말을 나에게 건넸다. “이별을 잘해서 그런 거야. 맺힌 거 없는 부녀관계여서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던 거고.” 이 말은 내가 평생 받은 위로 중 최고의 것이었다.
효녀는커녕 나는 살가운 딸도 아니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인생 곳곳에 드라마가 쌓여있는 아빠의 역사를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만 쑥스럽다는 이유로 질문 한번 한 적 없으며, 드물게 아빠가 “영어 공부는 나이 들어도 꾸준히 해야 한다”류의 조언을 하면 “그럴 시간이 어딨어”라고 받아치고 무시하는 그저 그런 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믿고 싶었다. 갑작스러워서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아빠와 잘 이별했다고. 좋은 관계였고 좋게 작별했기 때문에 이렇게 일상을 편하게 살 수 있는 거라고.
요즘 사회적 화두인 ‘좋은 죽음(웰 다잉)’은 두가지 의미가 있을 텐데 당사자가 원하는 방식의 삶의 마무리,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는 작별의 과정일 것이다. 쓰러진 뒤 열흘 만에 급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이런 의미에서 ‘좋은 죽음’을 준비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족과 큰 갈등 없이 노후를 보내고 긴 병 수발로 자식들을 지치게 하지도 않았으니 남은 식구들에게는 좋은 죽음을 선물하고 떠나신 셈이다.
그럼에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얼마 전 배우 박정자의 ‘생전 장례식’ 기사를 보다가 아버지의 좋은 죽음에서 부족했던 퍼즐 한 조각이 다시 떠올랐다. 영화 ‘청명과 곡우 사이’ (유준상 감독) 장례식 장면에서 배우 박정자가 하객을 연기하는 보조 출연자들 대신 오랜 지인들을 초대해 촬영하고 전날 밤에는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가상’ 고인에 대한 회고를 펼쳤다는 이야기다. 그가 보낸 부고장의 내용은 이렇다. ‘나의 장례식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꽃은 필요 없습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오래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을,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세요.’ 그리고 역시나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빵빵 터지는 실수담부터 주인공이 잊고 있던 추억까지 이런 자리가 없으면 한두명의 기억으로 묻히고 말았을, 발굴된 삶의 기쁨으로 가득했다.
박정자가 기획한 생전 장례식이 새로운 건 아니다. 몇달 전 다큐멘터리 ‘숨’의 유재철 장례지도사와 인터뷰하면서 “몸져누워 계신 어머니가 가족들을 못 알아보기 전에 생전 이별식(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 나도 팔순쯤 가족들과 지인들을 불러 따뜻한 밥을 먹으며 이별식을 할 예정”이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신경외과·방사선종양 전문의 박광우의 ‘죽음 공부’에서 숱한 죽음을 목도한 저자도 “나를 아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작별 인사를 하”는 생전 장례식을 하고 싶다고 썼다.
완치 불가의 폐 질환 판정을 받고 6개월 뒤 돌아가시기 전 아빠와도 이런 시간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우리 가족은 의사 말대로 “조심조심”하면 아빠가 5년이고 10년이고 더 사실 거라고 믿었다. 어쩐지 불길한 신변 정리나 작별 같은 이야기는 꺼내기도 싫었고 꺼낼 수도 없었다. 사실은 죽음과 직면하는 게 아빠도 가족도 무서웠던 것이다.
아빠의 임종 직전 작별 인사를 하라는 말을 듣고 평생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일곱살 때 아빠와의 애틋한 추억을 혼수상태의 아빠에게 이야기했다. 지금도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 추억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 나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을까? 생전 장례식을 했더라면 이 궁금증이 다 풀렸을 텐데. 아빠는 딸과의 행복한 기억을 좀 더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팔십대 후반을 향해 가고 있는 엄마와는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로 결심한다. 좋은 죽음을 위해서는 죽음 이전의 장례식, 이별식도 필요하다. 용기를 내보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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