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 성평등’ 측정할 준비 됐나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5. 6. 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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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께 설치된 미터 표준물(mètre étalon)은 국제단위계(SI)의 시초이자 길이 표준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필자 제공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반도체물리학 박사)

프랑스 파리 상원 맞은편 건물 현관 벽에는 소박하지만 특별한 대리석판이 있다. 1796년께 설치된 미터 표준물(mètre étalon)로서 국제단위계(SI)의 시초이자 길이 표준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과학적 합의를 통한 공통의 기준이 일상에 어떻게 뿌리내리는지를 보여주는 물리적 증거이기도 하다. 무심코 지나치는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 나 홀로 감격하며 기념사진을 남긴 이유는 1875년 미터협약이 체결되기까지 프랑스 혁명의 격동기 속에서도 단위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과학자들의 노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과학은 정확한 측정뿐 아니라 합의된 공통의 기준이 보장되어야 하는 공동 작업이다. 연구 현장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배경의 연구자가 동등한 조건에서 협업할 수 있어야 지속 가능한 혁신이 이뤄진다. 성평등 역시 그 기반 중 하나다. 여성 과학기술인의 경력 단절, 승진에서의 불균형, 의사결정 구조 내 대표성 부족 등은 조직 전체의 생산성과 직결되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에 따르면, 출산과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과학기술인은 약 21만5천명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수치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기술계가 어렵게 양성한 고급 인력의 유실이자 연구 환경 약화, 나아가 국가 전체의 혁신 역량 저하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다.

한편 대한민국은 올해부터 유럽연합(EU) 연구개발계획인 ‘허라이즌 유럽’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우리 연구기관이 유럽 과제에 독자적으로 참여할 기회이자, 동시에 유럽과 동일한 참여 요건을 갖춰야 함을 의미한다. 핵심 조건 중에는 성평등계획(GEP) 수립과 제출이 있다. 국내 연구기관이 허라이즌 유럽 과제에 참여하려면 기관 차원의 성평등 전략을 갖추고 이를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평등계획은 단순한 선언문이 아니라 조직 내 성별 통계 수집과 분석, 성인지 교육, 공정한 인사제도와 의사결정 구조 마련 등을 포함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다. 유럽의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이를 통해 조직문화를 진단하고 개선해왔으며, 실제로 연구 성과와 외부 신뢰도 모두 향상되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다. 이는 국제 협력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조직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전략이라 하겠다.

성평등은 여성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모든 구성원이 역량에 따라 공정하게 기회를 얻고 불합리한 제도로 인한 인력 낭비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조직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다. 매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성별 다양성이 높은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수익성이 평균 25% 이상 높고, 다양성이 가장 높은 상위 그룹은 하위 그룹보다 초과 이익 가능성이 36% 더 높았다. 또한 여성 리더 비율이 높은 조직의 혁신 성과가 최대 20% 이상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평등은 조직의 성과, 혁신력, 회복 탄력성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다. 또한 평등한 조직문화는 남성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성평등한 문화는 남성에게도 돌봄에 참여할 권리와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하며, 전 구성원이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경력을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우리 사회는 과연 허라이즌 유럽이라는 국제 협력 계기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는 26일, 국회에서는 ‘과학기술 분야 기관의 연구문화 혁신 방안’을 주제로 여성과학기술인담당관 주관의 정책 대토론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성평등은 과학계 전체의 성장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공공의 과제다. ‘측정할 수 있어야 관리할 수 있다’는 말처럼, 성평등 또한 정량적 데이터와 제도 기반 점검이 전제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과학은 실험실 안에서만 진보하지 않는다. 제도, 문화, 정책이 함께 진화할 때 비로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 150여년 전에는 석판에 새겨놓아야 했던 미터 단위가 이제는 상식이 되었듯, 성평등도 정책이 아닌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 잡는 날이 어서 오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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