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당선인 ‘이재명’ 그는 누구인가

정슬기 기자 2025. 6. 4.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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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소년공에서 노동 인권 변호사로···불평등과 싸워온 삶
‘기본사회’ · ‘당원 중심 정당’ 실현하며 제도 개혁에 앞장
내란 위기 속 국회를 지키고 국정 안정을 향한 정치적 전환 주도
▲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이 1990년대 후반 인권 변호사로 일하던 당시 토론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제21대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진짜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국민의 선택을 받은 이 대통령 당선인은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의 국정을 책임을 맡는다. 인천을 지역구로 둔 현직 국회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지역 정치사에도 의미 있는 기록으로 남게 됐다. 이 당선인의 정치적 뿌리는 경기지역이기도 하다. 이에 대통령 당선인 이재명의 성장 배경과 정치철학, 정책 노선, 최근 행보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과 정치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 소년공, 포기하지 않은 삶의 서사 

이재명 당선인의 삶은 흔히 말하는 '흙수저'로 시작됐다. 1964년 경북 안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남매 중 다섯째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경기도 성남 상대원동 공단 인근 단칸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이 당선인이 처음 취직한 곳은 고무 공장이었고, 납이 펄펄 끓는 화덕과 염산을 담은 용기, 화학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작업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13살이었다.

14살에는 냉동회사에 취직해 함석판을 자르고 접는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손은 수없이 베이고 찔렸으며, 지금도 그의 몸에는 100곳이 넘는 흉터가 남아 있다. 공장에서의 열악한 노동은 그의 손가락을 기형적으로 굽게 했고, 성장판 손상이라는 중대한 산업재해까지 겪게 했다.

혹독한 현실 속에서 그는 '평범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품었다. 공장 생활과 검정고시를 병행했고, 1981년 7월 마침내 공장 생활을 끝내고 대입 학력고사 준비에 전념했다. 결국 장학금을 받고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검사 임용을 고사하고 '거리의 이재명'을 위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이름 없는 소년공이 가슴에 품었던 '평범하고 공정한 세상'에 대한 열망은 단순한 사회적 성공이 아닌, 노동 약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노동 인권 변호사의 삶으로 이어졌다.

▲ 기본사회,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

이재명 당선인이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주목받은 이유는 '기본'을 향한 집착이었다. 그는 행정을 통해 '기본적 삶의 질'을 보장하는 데 집중했다.

성남시장 시절 전국 최초로 도입한 '청년배당'은 논쟁의 중심에 섰다. 24세 청년에게 연 100만원을 지급하는 이 정책은 '현금 퍼주기'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청년배당은 청년 복지를 획기적으로 확장해 자기 역량을 키울 기회를 제공한다"며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경기도지사에 취임한 뒤에는 이를 더욱 확장했다. 기본소득을 소비 쿠폰 방식의 지역화폐로 발행하고, 가맹 대상을 소상공인으로 한정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유도했다. 코로나19 확산 당시에는 모든 도민에게 재난기본소득을 제공했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이러한 정책을 '기본사회'라는 정치철학으로 정리했다. 이는 단순히 복지를 늘리자는 주장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의 존엄을 국가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이 당선인은 선거 기간에도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기본사회'를 실현하겠다"며 "빈곤과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나라,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면 돌파, 구조와 싸운 정치

이재명 당선인을 따라다니는 이미지 중 하나는 '싸우는 정치인'이다. 그의 정치는 늘 '충돌'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개인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불공정한 구조와의 싸움이었다. 이 당선인은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구조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2010년 7월 성남시장 취임 직후, 이 당선인은 당시 6500억원에 달하던 성남시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정부 최초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이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부정부패·예산낭비·세금탈루를 철저히 차단해 아낀 예산으로 복지정책을 강화하며 3년 만에 재정 정상화를 이뤄냈다.

그는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정치인 최초로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 요구하며 '촛불혁명'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이듬해 이 당선인은 제19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했으며, 비록 낙선했지만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계 인사로는 20년 만에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경기도지사 재임기에는 특별사법경찰단의 권한을 확대해 불법 고리 사채, 불량식품 유통 등 생활 속 불공정 관행에 정면 대응했다. 충돌을 피하지 않는 단호한 조치는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왔지만, '공정의 실현'이라는 원칙을 꺾지 않았다.

중앙 정치에 본격 입성한 이후에도 싸움은 계속됐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가족 관련 논란과 검찰 수사에 시달렸고, 당 대표가 된 후에는 검찰의 압수수색과 기소가 이어졌다. 2023년 8월, 그는 윤석열 정권의 민생 방치와 공권력 남용에 맞서 전면적 국정 쇄신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고, 결국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이듬해 부산 유세 중에는 지지자로 위장한 피습범에게 공격당하는 일까지 겪었다.
▲ 이재명 당선인이 지난 2022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후보로 출마한 모습. /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 당 대표, 민주당을 당원 중심 대중정당으로

이재명 당선인은 제20대 대통령선거 패배 이후 인천에서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 2022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다시 국회에 입성했고, 같은 해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됐다.

대표 취임 직후부터 그는 '당원 중심 정당' 구상을 실현해 나갔다. 중앙당사 2층에 당원을 위한 공간 '당원존'을 설치했고, 이를 전국 시도당으로 확산시켜 당과 당원 간의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좁혔다.

당내 기득권 구조를 바꾸는 조치도 이어졌다. 대의원 제도를 악용한 기득권 구조에 맞서 '대의원-권리당원' 간 투표 반영 비율을 조정해 권리당원의 영향력을 현실화했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천원 당원'으로 상징되던 권리당원들의 당내 위상과 정치 효능감이 크게 향상됐다.

2024년 당 대표 연임 이후에는 더욱 강력한 개혁이 이뤄졌다. '전국대의원대회'의 명칭을 '전국당원대회'로 변경하고, 공천 룰과 주요 당내 현안을 권리당원 투표로 결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로써 민주당은 실질적 당원 참여 기반의 대중정당으로 변모했다.

당 정책 결정의 투명성도 강화됐다. 이 당선인은 '정책 디베이트' 제도를 통해 주요 현안을 사전에 공개하고, 관계자들의 토론을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찬반, '상법 개정안', '반도체특별법 주52시간 예외 적용' 등 주요 정책들이 당원과 국민 앞에서 논의됐다. 이는 정당 내부의 민주성을 높이는 동시에, 사회적 대타협의 장을 제도화한 시도였다.

그의 당 운영은 팬덤 정치라는 지적도 받았지만, 민주당은 250만 당원 시대를 열었고, 지난해 총선에서는 야당으로는 헌정 사상 최초로 175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확보했다.
▲ 이재명 당선인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0분 기자회견을 열고 계엄선포는 명백한 위헌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제공=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 내란 종식, 국정안정을 위한 정치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당선인과 더불어민주당이 내세운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내란 종식'이었다. 지난해 윤석열 정부가 '12·3 비상계엄'을 전격 선포하면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당시 계엄령은 정치권과 시민사회, 국제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이재명 당선인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여의도로 모여 달라, 국회를 지켜 달라"고 호소했고, 국회 주변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국회의원들도 본회의장에 집결해 계엄 해제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계엄 선포 약 1시간 만에 정족수가 채워졌다. 국회를 둘러싼 시민들은 장갑차 진입을 저지하며 물리적 충돌을 막았다.

이후 이 당선인은 내란 사태 이후 흔들린 국가 신뢰 회복을 위해 국내외 메시지를 꾸준히 발신했다. 외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탄핵안 가결 과정과 국회의 대응,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 등을 알렸고, 당 국제국은 '국제협력본부'로 격상돼 관련 대응을 지원했다.

정치 일정을 재정비한 그는 곧바로 경제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영업자부터 중견·대기업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의견을 수렴하며 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 마련에 나섰다. 계엄 해제 이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고, 국정 안정화에 방점을 둔 행보다.

당시 상황은 이재명 당선인에게 정치적 시험대이자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는 사건 이후 헌정 질서 회복과 민생 안정이라는 과제를 중심에 두고 정치 일정을 이어갔다.

/라다솜·정슬기 기자 zaa@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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