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환란때 일용직 나간 아버지…영화 속 부도, 남 일 같지 않았죠”
- 90년대 진로그룹 매각 실화 바탕
- 야심찬 글로벌 투자사 직원 열연
- 회사 지키려는 유해진 맞서게 돼
- “실제로는 술 잘 못 마시는 성격
- 최고의 안주는 故 신해철 음악
- 배우 꿈꾸게 한 2000년대 영화
- 그 주인공인 유해진과 호흡 영광”
제목만 보고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소주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그린 영화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소주는 거들 뿐, ‘소주전쟁’은 경영권 인수를 놓고 치열한 수싸움을 하는 영화다. ‘빅 쇼트’ ‘인사이드 잡’ ‘마진콜’ 같은 금융 위기를 그린 할리우드 작품을 떠올리면 좋다. 영화는 1997년 IMF로 자금난에 처한 주류 회사 진로가 골드만삭스로 매각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소주전쟁’에서 이제훈은 국보소주를 인수하기 위해 움직이는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직원 최인범 역을 맡았다. 철저히 성과 위주로 움직이며 한국 시장을 겨냥한 그의 야심은 회사를 지키려는 국보소주의 재무이사 종록(유해진)을 만나면서 흔들린다.
▮약간의 숙취가 동반되는 영화

지난 1일 서울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제훈은 영화 속 인범이라는 인물에 대해 “가정과 회사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 세대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그런 인범이 종록을 만나면서 내적인 균열을 겪는다”며 “인범은 야욕이 있지만, 반칙을 써가며 성공한 사람을 보며 불편해한다.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해다.
‘소주전쟁’의 당초 제목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도덕적 해이)’였다. 이제훈은 “IMF 이후 대한민국 자본시장에 외국자본이 유입되고 개방되면서 기업의 지배 구조가 변화했다”며 “이로 인해 기업의 투명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글로벌 경쟁력이 진일보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외국 자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많은 이의 노력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도적적 해이도 존재했다. 이번 영화가 우리나라 경제 상황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기대감을 비쳤다.
그의 말마따나 ‘소주전쟁’은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보다 약간의 숙취가 동반되는 영화다. 일과 삶 사이의 밸런스, 돈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신념 등 영화를 보고나면 곱씹을 만한 부분이 많아서다.
‘소주전쟁’의 배경이 되는 IMF는 전국 가가호호와 국내 기업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훈에게도 IMF에 얽힌 사연이 있다. “집에서 자영업을 했는데 IMF 이후 장사가 안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가 새벽마다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러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힘든 상황이구나 짐작만 했지,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진 못했던 것 같다”며 “그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남아 있어서인지, 이번 시나리오를 보면서 아버지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시나리오에 대한 첫인상을 밝혔다.
주류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소주를 마시는 장면도 적지 않게 나온다. 하지만 정작 이제훈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고.
“대학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다가 숙취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믿지도 않는 온갖 종교의 다양한 신들에게 ‘다시는 술을 안 마시겠다’고 빌면서 숙취를 이겨낸 기억이 있다”고 웃어 보인 후 “이번 영화를 촬영할 때도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 홍보를 위해 예능에 출연하면서 술 마실 기회를 많이 만나고 있는데, 술 분위기라는 게 있지 않나.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짠 하는 순간 금방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이것이 바로 소주의 매력이라고 느꼈고, 소주가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 술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달고 쓰고, 인생에 대한 고통과 환희를 모두 느끼게 하는 최고의 매개체가 되는 술은 소주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소주 안주는 뭘까. 그는 고 신해철의 음악을 꼽았다. “신해철과 넥스트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라서, 그를 추억하며 술을 기울일 수 있다면, 그만한 안줏거리는 없을 것 같다.”
▮1990년대, 낭만 혹은 혼란

이제훈은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과 시대의 낭만을 온몸으로 연기한 바 있다. 극 중 시기로 볼 때 ‘건축학개론’은 IMF 한파가 터지기 1년 전 시기를 다룬다. 실제로 1990년대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국민의 시각은 크게 양분된다. 누군가는 정치 민주화와 경제 호황으로 낭만이 가득한 시기로 1990년대를 기억하고, 누군가는 IMF로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시기로 기억한다. 이제훈은 어떨까.
“저한텐 엄청난 낭만의 시대였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한국 영화들이 제겐 배우를 꿈꾸게 하는 중요한 모멘텀이었고, 전부였던 것 같다. 할리우드 작품들도 마찬가지인데 당시 한국 영화의 아름다운 영상미와 다양한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크리에이터들을 보면서 대단하단 생각을 많이 했다. 그때처럼 현재를 대변할 수 있는 작품들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솔직히 지금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끄럽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990년대~2000년대 초반의 낭만을 이야기하며 그는 유해진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낭만 속에 유해진이란 배우가 매 순간 있었던 것 같다. 유해진을 빼면 그 시절 한국 영화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배우다. 그런 배우와 이번 영화로 만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유해진 선배님만큼 주변을 무장 해제시키고 웃게 만드는 사람을 못 만났던 것 같다. 저도 형처럼 사람을 웃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며 유해진에 대한 애정을 한 가득 드러냈다.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운 영화광인 이제훈은 자신이 영화에서 얻은 감동을 타인에게 돌려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전국의 오래된 영화관과 작은 영화관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를 운영한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
“이제는 영화나 콘텐츠를 휴대전화나 태블릿을 통해 이동하면서 볼 수 있는 시대다. 집에 큰 TV를 장만해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영화관이라는 공간만이 주는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두운 곳에서 큰 화면과 좋은 사운드로 2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세상을 온전히 느끼고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그런 극장을 대체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반문할 때, 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걸 ‘제훈씨네’를 통해 이야기해 드리고 싶었다.”
‘소주전쟁’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는 이제훈은 tvN 드라마 ‘시그널’ 시즌2 촬영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원년 멤버인 김혜수 조진웅 등이 모두 참여하는 만큼 시청자의 기대가 큰 상황.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tvN 10주년 때 ‘시그널’이 나왔는데, tvN 20주년작으로 시즌 2가 방영된다. 벌써, 10년이라니! 시즌1에서 종료된 시점에서 스토리가 바로 이어지는데, 무엇을 상상하시든 상상 이상의 이야기 전개가 엄청나게 펼쳐질 것”이라고 언급한 후 “작품마다 마스터피스 같은 작품을 만나고 싶은 게 개인적인 소망이다. 쉬운 일은 아닌데, ‘시그널’ 시즌2가 그걸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싶다. 저뿐만 아니라 출연하신 배우들과 김은희 작가님의 마스터피스 같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치열하게 촬영하고 있으니 많이 봐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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