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지폐에서 '독립 영웅' 얼굴이 사라졌다...왜?
독립 상징이던 라흐만 초대 총리 초상 빠져
현지 범죄재판소, 하시나 전 총리 재판 개시

방글라데시 정부가 자국 지폐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초대 총리의 초상화를 없앤 새 지폐를 발행했다. 독립의 상징이던 그의 얼굴이 사라진 배경에는, 20년 넘게 권위주의 통치와 반인도적 범죄를 이어오다가 지난해 축출된 그의 딸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에 대한 반발 여론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일 AFP통신 등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은 새로 발행하는 지폐 9종 가운데 3종을 전날 공개했다. 지난 50여 년간 방글라데시 모든 지폐에 실려 있던 라흐만 전 총리 초상은 이번에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새 지폐에는 힌두교와 불교 사원, 순교자 기념비 등 문화유산과 영국 식민 시기 200만 명 넘게 사망한 벵골 대기근을 묘사한 작품 등이 담겼다.
아리프 호사인 칸 방글라데시 중앙은행 대변인은 “새 지폐에는 어떤 인물 초상도 넣지 않는다”며 “대신 자연 풍경과 전통문화유산에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중앙은행은 라흐만 전 총리 초상을 뺀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라흐만 전 총리는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이끈 주역이다. 1975년 군부 쿠데타로 암살된 이후에도 국부로 추앙받아왔다. 지난해 대학생 시위에 밀려 축출된 하시나 전 총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하시나 전 총리는 ‘국부의 딸’이라는 상징성으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21년간 계속된 부정 선거 의혹과 야권·언론 탄압, 부정부패 논란으로 민심을 잃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독립 유공자 후손에게 공직 30%를 할당하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반발 여론에 부딪혔다. 이후 같은 해 7월 대학생 시위를 무력 진압하다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한 달 뒤 인도로 달아났다. 유엔은 당시 3주간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약 1,4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방글라데시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과도정부 최고 고문(총리 격)을 맡아 정국을 이끌고 있다. 이번 중앙은행 결정에는 독재와 인권 유린을 떠올리게 하는 ‘셰이크 가문’의 얼굴을 더 이상 국가 화폐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새 정부 의지가 담긴 셈이다. 인도 일간 비즈니스스탠더드는 “방글라데시 정치·문화 담론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치적 청산 작업은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로도 이어지고 있다. 방글라데시 국제범죄재판소(ICT)는 반정부 시위대 탄압 혐의로 하시나 전 총리와 당시 경찰청장, 내무장관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모하마드 타즐 이슬람 ICT 수석검사는 “피고인 3인은 방조, 선동, 공모, 조장, 음모 및 대량 학살을 막지 못한 책임 등 혐의가 있다”며 “민주국가에서는 반인륜적 범죄에 관용이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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