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 핀 둔덕마다 무덤도 많은 나라

고정국 2025. 6. 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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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21) 염소

풀만 먹고 살다가 풀물 든 소리로 운다
겉늙은 몰골이야 내 혈족을 닮았느니
북간도 막막한 벌에 흩어지던 풀씨였네

일자무식 식솔 하나 누명 쓰고 갔거니
눈자위 희뜩희뜩 쇠사슬에 끌려간 땅
올해도 망향의 꽃은 사할린에 피었더냐

흰꽃 핀 둔덕마다 무덤도 많은 나라
상잔의 포연 속에 꽃 한 송이 지던 날부터
촌로는 한 채 봉분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

눈물이 안으로 흘러 뿔도 어진 짐승이여
삼대 째 빈농의 한이 칡뿌리보다 깊다 해도
핏빛 먼 반목의 세월 그 강 빛이 슬퍼라

때로는 비탈에 뜨는 이산가족의 눈빛이거나
이울 듯 한반도의 질경이 목줄과 같은
오천 년 강둑을 지킬 근성 하나 키우며 산다.

/1989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나의 등단초기, 서정과 서사의 갈림길에서 잠깐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서정을 노래할 것인가, 서사의 길을 택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서정 속에 서사를 녹이고, 서사 속에 서정을 노래하자는 나름대로의 '갈림길'에서의 '만남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썼던 작품 중의 하나가 오늘 이 「염소」라 할 수 있습니다. 

"풀만 먹고 살다가 풀물 든 소리로 운다" 그리고 "겉늙은 몰골" "눈자위 희뜨희뜩" 등 억지로 끌려가는 염소의 모습에서 북간도나 사할린 등지에 흩어지던 동포를 떠올렸습니다. 거기에다 부모는 죽으면 산에 가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선조들의 전언을 듣고 자란 필자로써, 한국전쟁 당시 조국을 지켜달라고 자식을 전선에 보낸 후, 전사통보를 받고 그 자식을 가슴에 묻은 촌로村老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썼습니다. 그래서 한반도 어디를 가도 무덤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핏빛 먼 반목의 세월"이 끝나고 통일조국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특히 한반도 표토表土에 고루 분포돼 있는 "질경이 목줄"같은 민족근성을 살리면서 '염소'에게 그 제목을 빌렸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