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84] 작가가 수프 끓여 대접하는 전시회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5. 6. 2.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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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크릿 티라바닛, 무제 (분당 한 번의 회전), 1996년, 프랑스 디종 르콩소시움에서의 개인전 장면.

1996년 프랑스 디종의 현대 미술관 르콩소시움에서 태국 출신 미술가 리크릿 티라바닛(Rikrit Tiravanija·1961~)의 개인전이 열렸다. 하지만 전시장 한가운데를 차지한 건 흔히 생각하는 ‘미술품’이 아니라 간이 부엌과 식탁이었다. 개막하는 날, 작가는 거기서 관람객들에게 따뜻한 수프를 끓여 대접했다. 그 이후로는 전시 기간 내내 방문객들이 스스로 수프를 끓여서 먹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누가 먼저 왔고, 누가 나중에 왔는지, 누가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술관을 찾은 이들은 누구든 자유롭게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다가, 차를 우려 마시기도 하고, 매트에 눕거나, 따로 마련된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전시장에는 인공 조명 대신 그저 햇빛이 들어올 뿐이었다. 덕분에 언제 하루가 끝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미술품’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티라바닛은 르콩소시움에서 소장하고 있던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을 군데군데에 그야말로 장식품처럼 놔뒀다. 하지만 그는 예술이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술이 과연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따뜻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대화하고, 편하게 몸을 뉠 자리를 내주고, 악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등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서 여럿이 함께 하는 공동체에 대한 본능적인 소망을 되새기게 해줬다.

티라바닛은 공간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며 소비가 아닌 협업을, 관람이 아닌 참여를, 침묵이 아닌 대화를 통해 작품의 일부가 된 셈이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이다. 투표란 결국 누구를 선택하든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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