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9장] 영광·함평·나주·무안 동학농민군(157회)

정희윤 기자 2025. 6. 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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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안되아요."

이성자는 김옥규를 거부하면서도 김옥규가 끌어안은 팔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미안하고만."

김옥규는 성자의 몸을 더듬으면서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왜 미안하다는 것이여?"

"나 때미 아버지한티 당한 것이 미안하더랑깨. 성자씨가 양곡을 거저 준 줄 알았으면 나가 가져오들 않제."

"이렇게 빨리 가져올 줄은 몰랐제. 가을걷이를 할 때 가져올 줄 알았당깨."

"서로간에 신호가 안맞아부렀네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제."

"그럼 날 델꼬 살라고?"

"같이 살자고 나 따라온 것 아니여?"

"왜 반말이여?"

"나이 한 살 차이잉개 맞먹어도 되제. 그라고 나는 남자 아니더라고?"

성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동학은 남녀 차별이 없다는디 옥규씨 말 들어봉개 틀린 말인감만. 동학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보물로 여긴다고 하던디 옥규씨 말 들어봉개 그것도 아닌 모양이여."

도톰한 입술, 시원한 이마,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반짝이는 눈…무엇 하나 빠진 곳이 없는 처녀었다. 성자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동학이 여자들을 남자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찾아갈 생각을 하였어. 남자들한티 하대받고 사는 것이 성가셨당개 "

"그렇구만. 생각이 깊네이. 나가 여자를 쉽게 본 것은 나쁜 습관이여. 하지만 그것도 다 내력이 있는 것이고만. 고건 윗대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았던 것이여. 하지만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더만.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사대부나 백성이나, 남자나 여자나, 하나씨나 어린아이가 다 동등하다는 것이제."

김옥규는 정이두로부터 배운 것을 돌이켜보았다. 양반이든 상놈이든, 마님이든 하녀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최 교주는 베짜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고 그가 곧 하늘이라고 했다. 베틀 앞에 앉아 움직이는 정교한 손놀림과 발놀림에 며느리에게 넙죽 엎드려 "나의 하느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늘 눌려살던 며느리가 비로소 사람으로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수천 년만의 깨우침이라고 하였다. 이 당연한 일이 왜 수천년동안 외면되었을까. 누구나 성스러운 일을 하면 존재의 신분 여부를 떠나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묵살된 것이 어디에서 연원한 것이었을까.

김옥규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식 여섯을 낳고, 밥상을 안방에 넣어주고, 본인은 여전히 부엌에서 잔 일을 한다. 밥상이 물려 나오면 먹다 남은 음식을 선 채로 긁어먹거나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먹는다. 남편으로부터 하대를 받고, 때로는 얻어맞기도 한다. 그러니 아이들로부터도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런 세월을 당연시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다. 김옥규는 성장할 때까지 어머니가 언제 밥을 먹는지를 모르고 자랐다. 그저 밥을 안먹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다. 그런 것까지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런 어느날 아버지가 관아에 끌려가 호되게 맞고 돌아와 며칠째 생똥을 싸더니 드러누운 사흘만에 장독으로 죽었다. 남보듯이 한 남편의 죽음을 보고 어머니가 마당을 뒹굴며 우는 모습을 보고 참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납작 엎드려 살면서도 끽소리 한번 못하던 어머니가 지아비를 잃자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그가 동학에 참여한 것도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절규를 보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성자가 그 아비로부터 꾸중을 듣고 싸대기까지 맞았다. 모든 책임은 김옥규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 그 어미가 지아비에게 대들었다. 시집갈 불쌍한 딸자식을 왜 때리느냐고 악다구닐 쓰며 대들었다.

김옥규는 그녀를 깊이 안으며 속삭였다.

"우리 깊은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 삽시다. 도망가 살면 아무도 모르겄지요. 성자씨를 하늘처럼 받들고 살고 잡소. 우리 둘이라면 어떤 무엇도 할 것 같으요."

그의 품에 안겨있던 이성자가 물끄러미 김옥규를 올려다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