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금도를 다시 생각한다 [인문산책]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며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경문왕은 신라 말기의 비극 속에 핀 꽃이다. 재위 기간은 861~875년 사이 15년간이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온갖 추한 꼴이 되풀이되던 시기였다. 이름은 응렴(膺廉). 앞서 민애왕이 희강왕을 죽였고, 신무왕이 다시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 때 조금 안정됐지만, 그에게 아들이 없어 삼촌인 헌안왕이 후계자가 되었다. 응렴(경문왕)은 비참하게 죽은 희강왕의 손자였다.
헌안왕 4년(860) 9월,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았다.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이었다. 왕실 젊은이들도 함께 불렀는데 응렴도 참석했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그의 나이를 15세로, 삼국유사는 20세라고 전한다. 헌안왕은 응렴에게 "화랑이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며 본 좋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응렴은 거침없이 "세 가지"라며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은 고귀한 가문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있을 때 자기가 나서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자리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집안에 재물이 넉넉하여 의복을 사치할 만한데도 늘 삼베와 모시옷으로 기꺼워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는 사람이면서 한 번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대로 옮겨보았지만 응렴이 말한 '좋은 일'이란 △겸손한 사람 △검소한 사람 △탈권위적인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 고귀한 신분, 부유한 재산,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한 사회의 상류층이 돼 나서고 사치하고 위세를 부릴 사람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않는 사람을 만났으니 응렴에게는 '좋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알아본 응렴도 같은 결을 지닌 인물일 것이다. 삼국유사는 응렴의 '어진 성품'을 알아 본 헌안왕이 "눈물이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감격했다고 썼다. 왕은 그 자리에서 응렴을 사위로 점찍었다. 그뿐인가. 4개월 뒤에는 왕위까지 물려주었다. 바로 경문왕이다.
우리가 잘못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금도(襟度)를 지킨다'다. 사전은 금도를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度量)"이라고 풀이한다. 금(襟)은 옷깃이나 앞섶인데, 이것이 넓을수록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다. 곧 '사람의 품'이라는 의미로 확장됐다. 그러므로 '금도를 지킨다'가 아니라 '금도를 보인다'가 바른 표현이다. 오늘날 지도자의 금도는 옛 경문왕이 말한 '세 가지 좋은 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국민이 내일 뽑을 새 대통령에게 꼭 바라는 바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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