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향한 마지막 헌신’ 유해·묘소는 아직도 미상
안정적 삶 뒤로하고 조국 독립운동 투신
조선 사회주의 이끈 운동계 엘리트
1928년 1월 조선 입국시도 무위로 돌아가
일제 의심에 수감 못피해 2년간 옥고
출옥 얼마 지나지 않아 폐병으로 사망
정부 공훈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유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기증
현재 유해 소재 파악 안되고 묘소 묘연
후손들 “유해 행방 절실히 알고싶다”
광복 80주년 잃어버린 영웅을 찾아서- 15. 죽음도 막을 수 없던 애국, 채성룡 지사
1928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한 조선인이 자신의 뿌리인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 그의 이름은 채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한국명 채성룡(蔡成龍)이다. 이미 자신의 가족들은 1860년대 연해주로 이주, 러시아에 정착한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7명의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정적인 삶을 뒤로 하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모국이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고 유린당하는 모습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러시아를 떠난 그의 유해는 영원히 조국에 묻히게 됐다.

■러시아에서 온 조선인
채성룡(1892-1930) 지사는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반일 저항 운동의 조직자이자 지하공작원이면서 동시에 첩보원이었다. 1928년 1월11일, 채성룡 지사는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했다. 그는 조선에 무사히 들어오면 박준호(朴俊浩)라는 가명으로 활동할 계획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입국은 무위로 돌아갔다. 중국 베이징에서 여정을 시작한 그는 안동역과 신의주역까지 신분을 들키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신의주역을 지난 시점에서 신의주경찰서 소속 경찰대에게 체포(남시역 혹은 차련관역으로 추정)되고 말았다.
일제에게 붙잡힌 그는 취조를 받아야 했다. 당초 채성룡은 동료들과 함께 입국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안전을 위해 각자 입국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채성룡이 붙잡히며 자칫 동료들도 검거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채성룡을 구금 20일 만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끈질긴 취조 끝에도 동료를 지킨 그는 단독범 신분으로 이송됐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에 사건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첩했다. 채성룡의 조선 입국 시도를 단독범 사건으로 종결시키기에는 그가 조선인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거물급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같은해 2월 4일 채성룡을 경성으로 이송, 그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했다.
수감된 이후 일제는 그를 끈질기게 취조했다. 그는 꺾이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조선 태생이 아닌 점을 적극 활용, 진술에 활용했다. 채성룡은 자신이 러시아 동포 3세로서, 조선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국에 한 번도 와보지 못했기에 이번 기회에 고향 땅을 구경하고자 조선을 찾았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그의 주장은 통했다. 수감을 피하지는 못했으나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데 그쳤다. 일제는 결국 그의 동료들을 붙잡지 못했다.
감옥살이가 고됐던 탓일까. 그는 안타깝게도 만기 출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선도자
채성룡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 인물이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태동할 때부터 함께했다. 모스크바에서 공산대학을 졸업했고, 러시아공산당 연해주당 고려부 비서, 연해주당 정치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그야말로 조선 사회주의 운동계의 엘리트였다.
1920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전로고려공산단체(全露高麗共産團體) 대표자대회에 참석해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러시아의 옴스크에서 자유대대의 최고려(崔高麗)·오하묵(吳夏默) 등이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가 개최,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이, 부사령관에 오하묵이 선출됐을 때 김하석(金夏錫)과 함께 군정위원으로 선임됐다.
한인 혁명군사위원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했으며, 1922년 12월 중순부터는 이성(李成), 김철훈(金喆勳) 등과 협의해 전한공산당대표회(全韓共産黨代表會) 소집 발기회를 조직하고, 교통연락망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1923년에는 북경고려공산당(北京高麗共産黨)의 총무로 활동했고, 1926년 5월 북경에서 북풍회 공산주의그룹의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이 되기도 했다.
채성룡에 대해 그의 고손녀인 김 안나(사진)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덕분에 내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내왔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꼈다”면서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당시에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죽어서도 계속된 애국
1930년 3월 29일. 채성룡은 형기를 마치고 서대문형무소를 나섰다. 2년간의 옥고로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결국 그는 출소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9일,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당시 그에게는 아내와 7남매 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기에 정작 조선땅에는 그의 친척이 없었다. 이에 신간회 본부가 장의위원회를 맡았다.
일제는 그의 죽음 조차도 훼방을 뒀다. 영결식이 진행되던 도중, 일본 경찰은 현장에서의 발언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집회를 중지시켰다.
그는 죽어서도 조국에 헌신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채성룡은 자신의 유해를 의학 연구재료로 써달라는 말을 남겼다. 이에 채성룡의 유해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해부학 실습에 사용됐다. 그의 인체 표본은 학생들의 학습 교재로 쓰였다.
■찾고 싶은 유해, 이역만리 후손들의 소망
안타깝게도 채성룡 지사의 유해는 현재 소재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그의 가족들은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동, 현재도 거주 중이다.
이에 채성룡은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나 이때 당시만 해도 그의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이 후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거주 중인 채성룡의 후손을 확인, 2014년 3월에서야 후손에게 훈장이 전달됐다.
이처럼 채성룡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기에 그의 묘소 위치도 묘연한 실정이다.
학습 교재로 활용되던 채성룡의 유해는 동료들에 의해 강철로 된 관에 안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묘소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먼 타국,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채성룡 지사의 후손들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제라도 그의 유해가 어디로 갔는지 절실하게 알고 싶어하고 있다.

채성룡의 고손녀인 김 안나씨는 “우리 가족을 대표해 요청을 드린다”며 “가족 기록에 따르면 고조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유해를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셨다. 우리 가족은 그의 뜻은 존중하지만, 이후 그의 유해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 유해가 기증된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잘 알고 있지만, 작은 정보라도 알고 싶다”고 호소했다.
국가보훈부도 채성룡의 묘소를 찾고 있다. 그는 국가보훈부의 묘소 찾기 대상자에 올라 있는 상태다.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국가보훈부(1577-0606)로 연락하면 된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정민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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